(연길 도심 남쪽에 위치한 연변예술극장, 80여년전 이곳에 연길감옥이 있었다.)
2013년 5월, 연길 도심 남쪽에 위치한 연변예술극장(延邊藝術劇場) 주변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낡은 집 개조공사를 벌이던 현장에서 불현듯 녹이 뻘겋게 쓴 족쇄가 발견된 것이다. 주변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섬뜩한 물건은 대뜸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중공 연길시위 당사연구실 주연휘(周延煇) 연구원은 그때 가슴이 널장 뛰듯 쿵쿵 하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바로 저쪽 공사 현장에서 족쇄가 발견됐지요. 족쇄는 녹이 쓴 상태였는데 부순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 문물은 지나간 투쟁사의 견증이고 역사의 견증입니다. 이는 과거 이곳에서 아주 잔혹한 투쟁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힘 있게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80여년 전, 이곳에는 악명 높은 연길감옥(延吉監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민국 13년(1924)에 세워진 연길감옥은 당시 "길림성 제4감옥"으로 명명되었다. 부지면적이 1만 ㎡로 당시 연변지역에서 제일 큰 감옥이었다. 연길감옥은 훗날 중경(重慶)의 백공관(白公館)과 사재동(渣滓洞)에 버금가는 "악마의 소굴"로 불렸다. 백공관과 사재동을 둘러싼 "붉은 바위"이야기는 동명의 소설 "붉은 바위"에 나오는데, 1940년대 말 중경의 국민당 감옥에 수감된 공산당인들의 옥중 투쟁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누군가 일부러 파괴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감옥 옛 터의 족쇄… 그렇다면 백공관과 사재동에서 일어났던 "붉은 바위(紅岩)"의 이야기가 이곳에서도 일어났던 것일가?
(연길감옥 유지에서 발견된 족쇄 /사진:중공연길시위 당사연구실 제공)
연길감옥의 "붉은 바위"의 이야기
"'9.18'사변이 발발한 후, 일본침략자들은 이 감옥을 접수하고 '연길모범감옥'이라고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른바 '모범'이란 혁명자(반일투사)를 진압하는 수단이 보다 잔인했음을 의미하지요."
주연휘 연구원은 그때 그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930년대, 일제와 괴뢰 만주국은 "반만항일(反滿抗日)" 투쟁을 진압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체포된 반만항일 인원들은 일부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압송되었고 일부는 연길감옥과 길림감옥에 수감되었다.
"9.18"사변 이후, 무려 1,000명에 달하는 반일투사가 연길감옥에 감금되었다. 이 가운데는 중국공산당 왕청현 (汪淸縣) 당위원회 초대 서기였던 김훈(金勳)도 들어있었다.
김훈은 체포된 후에도 감옥에서 항쟁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훈은 감옥에 중공 연길감옥 지하당위원회를 설립하고 서기 직무를 맡았으며 감옥 투쟁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이때 연길감옥에는 두 차례의 탈옥투쟁이 일어나지만 변절자의 밀고로 모두 실패했다. 수감자들에 대한 감시는 보다 더 심해졌으며 옥중 투쟁은 보다 더 어려워졌다.
이 무렵 김명주(金明柱)라고 부르는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훗날 김명주는 연길감옥의 집단탈옥 사건에서 제일 관건적인 인물로 되고 있다. 운명의 작간인지 모르지만, 이때의 김명주는 공산당 조직과 별로 연관이 없었던 인물이다. 기어이 이때의 그와 공산당 조직을 연관시킨다면 어릴 때 공산당 소년선봉대(少年先鋒隊)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었다고 할까…
김명주는 옛 소년선봉대 대장으로부터 석유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받았다고 한다. 그날 밤 마을 류(劉)씨 성 지주의 가옥과 낟가리에 누군가가 불을 놓았다. 현장에서 석유 병이 발견되면서 김명주는 졸지에 방화범으로 낙인 되어 연길감옥에 수감되었던 것이다.
연길감옥에서 김명주가 뭇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인물로 떠오른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김철수 (金哲洙) 연변박물관 원 부관장 겸 연구원은 그때 그 당시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죄수'들이 하루는 하남다리에서 '구렁창'을 가시게 되었는데 한 일본여인이 아이와 개를 데리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먹던 기름떡이 땅에 떨어졌는데 여인이 죄수들을 향해 그 기름떡을 던져 주었지요. 개보다도 못하다는, 인격모독이지요. 성질(성격)이 사나왔던 김명주는 삽으로 흙물을 퍼서 그들을 향해 냅다 뿌렸지요. 급기야 큰일이 난 것입니다. 일본사람을 무시했다고… (김명주가) 간수들에게 죽게 얻어맞고 감옥에 끌려 들어왔는데 상황이 형편없었지요."
"구렁창"사건은 김훈을 비롯한 수감자들의 극도로 되는 분개를 자아냈다. 연길감옥 중공 당 조직은 "구렁창"사건을 발단으로 단식투쟁을 단행했다. 이들은 김명수의 상처를 치료하고 야만적인 폭행을 가했던 이(李)씨 성 간수를 면직시킬 것, 병상의 수감자들을 하루속히 치료해줄 것, 밥을 깨끗이 하고 양을 증가하며 감방안의 대우를 개선할 것 등 세 가지 요구를 제기고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끝까지 단식투쟁을 계속할 결의를 다졌다.
단식투쟁 3일차 되던 날, 감옥당국이 부득불 이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기로 하면서 단식투쟁은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구렁창"은 더러운 오물이 빠지지 않고 썩어서 고여 있는 바닥이라는 뜻을 가진 "시궁창"의 방언이다. 이때 인간세계에서 "시궁창"으로 몰려 버림과 모역을 받은 김명주의 감수는 남달랐다. 그는 이 단식투쟁을 거쳐 중공 당 조직의 힘을 또 한 번 절실히 느끼게 된다. 더구나 김훈 등 항일투사의 직접적인 교육과 솔선적인 영향은 그를 이때부터 확고한 항일신념을 가진 "투사"로 변신하게 한다.
김명주가 훗날의 감옥 탈옥사건에서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에 새겨진 "연길감옥가")
동북지역을 진감한 연길감옥의 탈옥사건
감옥당국은 수감자들이 다시 조직되어 사단을 만들까봐 두려워 한 달에 몇 번씩 감방을 옮기게 했으며 정치범들의 감방은 더욱 자주 옮겼다.
그러나 옥중 수감자들의 항쟁의 열기는 결코 식지 않았다. 이때 바로 연길감옥에서 유명한 노래 "연길감옥가(延吉監獄歌)"가 탄생하는 것이다.
훗날 "연길감옥가"의 작사자 이진(李進)은 무거운 족쇄를 찬 채 이 노래를 부르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바람세찬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기에 폭탄차고 날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이후 몸은 시들제
혁명에 끓는 피야 언제 식으랴
감수놈이 웨치는 소리 높고
때마다 먹는 밥은 수수밥이라
밤잠은 새우잠 그리운 꿈에
나의 사랑 여러 동지 그립구나. "
……
사실상 이 시기 항일투사 윤범(尹範), 신춘(申春) 등이 육속 살해되고 오세국(吳世國)도 감방에서 끌려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는 등 연길감옥의 당 조직은 전례없는 파괴를 당하고 있었다.
이에 앞선 1934년 겨울, 연길감옥 옥중 투쟁의 핵심지도자로 있던 김훈도 적들의 암해로 희생되었다고 김철수 연구원이 설명한다.
"(단식투쟁이 승리한지) 얼마 안 되어 (그해 겨울) 일본군이 연길 부르하통하의 하남다리를 짓는 위에서 김훈을 얼음구덩이에 밀어 넣었습니다."
김훈 등 지도자들이 연이어 희생된 후 연길감옥 지도자의 중임은 김명주의 두 어깨위에 떨어졌다. 김명주는 김훈 등의 부탁을 명기하고 겉으로는 표현이 좋은 척 하면서 집단 탈옥의 기회를 노린다.
1935년의 초여름, 김명주는 우연히 간수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주연휘(周延煇) 연구원은 그 때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단오절에 3-5일간 운동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때가 되면 감옥에 몇몇 당직 인원만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이 경기장에 모이고 저녁에는 술판도 벌어진다는 정보였습니다. 김명주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일하는 틈을 타서 이영춘(李英春)과 이태근(李泰根) 등 옥중의 몇몇 당조직 지도자들과 만나 단오절 운동회가 열리는 두번째 날 (음력 5월6일) 오후에 거사를 치르기로 하고 17명에 달하는 결사대를 조직했습니다."
이때 거사계획에 약간의 차질이 생긴다. 음력 5월 6일, 일부 사람들에게 동요정서가 나타나면서 거사는 부득불 다음날로 미뤄지는 것이다.
음력 5월 7일 오후 3시, 점심 후 결사대 대원들은 신호를 주고받으며 탈옥준비에 들어갔다. 이들은 목조장(木造場)에서 훔친 조막 도끼로 족쇄를 부순 후 다시 삼노끈으로 매놓고 눈가림을 했다.
이때 그들은 갑자기 감방에 들어온 왕(王)씨 성의 간수를 결박하고, 또 당직 차로 찾아온 일본인 지도관을 처결하며 이어 감방 문 어구의 보초병을 처리하고 간수실의 간수들을 처단하며 소총 50여 정과 수류탄 10여개를 노획한다.
이때부터 김철수 연구원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편의 영화를 방불케 하고 있다.
"앞에서 이미 한사람은 일본 지도관의 권총을 잡고 나가면서 밧줄을 쥐고, 김명주가 옆으로 도끼를 든 채 간수를 압송하면서 나갔습니다. 간수가 달아나면서 소리치는 바람에 총을 쏘았지요. 총소리가 나니까 다 알게 된 것입니다. 김명주는 다시 도끼를 쥐고 감방으로 뛰여 들어가 다른 감방문도 다 열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감방에서 권총을 들고 나오는 감옥장과 마주쳤지요. 더없이 긴장한 상태인데 뒤에 있던 사람이 간수의 총으로 감옥장을 쏘아 눕혔지요…"
미구에 탈옥에 성공한 이들은 적들의 추격목표를 줄이기 위해 두 갈래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항일근거지를 찾아가기로 한다.
김명주 일행은 모아산(帽兒山) 고개를 넘을 즈음 일본 수비대의 추격을 받았다. 탈옥 3일째 되던 날, 그들은 적들과 조우하면서 3차례에 달하는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이때 김명주는 여러 곳에 부상을 당하며 왕덕발(王德發)과 이영춘 (李英春) 등은 다른 사람들의 철수를 엄호하다가 희생되었다.
( 연길감옥 유지에 세워진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 )
예술전당에 세워진 영원한 기념비
김명주가 인솔한 탈옥자들은 마침내 일본군의 추격에서 벗어나 안도(安圖) 차창자(車廠子) 항일근거지에 도착했다. 며칠 후 이태근이 인솔한 다른 한 갈래의 탈옥자들도 근거지에 이르렀다. 이때 두갈래 대오의 인원은 50명 미만으로 탈옥 당시의 절반도 안 되었다고 전한다.
"연길감옥 탈옥투쟁은 동북지역에서 공산당이 영도한 탈옥투쟁 중 유일하게 성공한 탈옥투쟁입니다. 이는 동북지역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북인민들의 항일투지와 승리신심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주연휘(周延煇) 연구원은 연길감옥 탈옥투쟁승리가 갖는 의미를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제 날 높은 담과 철조망이 둘러섰던 연길감옥 옛터에는 현재 인민의 예술전당으로 불리는 연변예술극장이 들어섰다. 예술극장 주변에는 수양버들이 휘늘어졌고 극장 앞에는 춤을 추는 조선족 여성의 조각상이 자리를 잡았다. 2000년 6월, 이곳에는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가 세워졌다.
"영용무쌍한 투사들을 부각한 이 조각이 바로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입니다. 이곳 연길감옥투쟁 유적지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비문은 연길감옥투쟁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문 아래에 새겨진 것이 바로 이진이 작사했던 '연길감옥가'입니다."
연길감옥 옛터로 우리를 안내하던 주연휘(周延煇) 연구원은 기념비 앞에 그린 듯 잠깐 서있더니 조용히 "연길감옥가"의 가사를 읽기 시작했다.
"바람 세찬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 기에 폭탄차고 날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이후 몸은 시들제
혁명에 끓는 피야 언제 식으랴..."
허공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옛 가사의 낭독 소리, 그리고 예술전당과 나란히 한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
"연길감옥가"가 새겨진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는 영원한 역사적 징표로 그제날 인간지옥에 오늘날 예술의 전당이 들어설수 있도록 몸바쳐 싸운 항일 영웅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연길감옥 유지에 일떠선 연변예술극장)
(글:중국국제방송국 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