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봄바람이 이는 4월의 어느 하루, 하남(河南) 신현(新縣)의 싱그러운 차잎향을 따라 일행이 닿은 곳은 허세우(許世友)옛집이였습니다.
허세우는 중국인민해방군 고급장교이고 중국 부총참모장이며 중공중앙정치국 위원, 남경군관구 사령원, 중공중앙고문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했습니다.
"이 한몸 살아생전 나라에 충성하고 이 한몸 죽고나면 부모님과 함께 하리라."
허세우는 이 신조대로 전란시기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고 고향 하남(河南) 신현(新縣) 전포향(田鋪鄉) 서가와(許家窪)에 고이 잠들었습니다.
만자산(萬紫山) 기슭의 내룡령(來龍岭)에 자리잡은 허세우옛집은 오룡산(五龍山)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허세우의 일생을 그린 부조벽(浮彫璧)이 보입니다. 이 부조벽에는 허세우가 모택동 주석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며 모친께 무릎꿇고 있는 모습, 전방을 시찰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이 둥그런 부조벽에는 이름만으로도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장군 허세우의 전설적인 일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부조벽을 에돌아 올라가면 허세우의 묘가 보입니다. 산허리에 위치한 허세우의 묘지는 두 산 사이를 잇는 안부(鞍部)를 등지고 있습니다.
"이 묘지의 부장품에는 허세우가 생전 즐겨 마시던 모태주와 그가 아끼던 엽총, 인민폐 100원이 들어있습니다. 이 세가지 부장품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술은 담력을 키우고 총은 적을 물리치고 돈으로 길을 내니 허세우 장군은 어디에 가도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는 허세우에 대한 사람들의 애틋한 바람과 축복이 들어있었습니다. 허세우 묘지에는 빈 모태주 술병들이 줄줄이 배열되어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허세우를 추모하러 온 사람들이 이 애주 장군에게 바치는 "선물"이라고 합니다. 허세우는 전쟁년대부터 유명한 애주가였고 해방 후에는 모태주를 특히 즐겼다고 합니다.
허세우 묘지에서 내려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허세우가 살던 옛집이 보입니다. 허세우옛집은 남북향으로 된 전목구조의 집입니다. 이 옛집에 들어서면 곧 10여평방미터 되는 객실인데 이곳에는 사각책상과 양옆에 나무로 된 의자가 놓여져 있습니다. 좌우 양벽에는 무명실을 뽑는 물레며 직기, 갈퀴, 사의 등 유물이 걸려져 있습니다.
정문과 마주한 객실벽의 옆문에 들어서면 동서향으로 이어진 작은 방 4칸이 있는데 반지하식으로 한칸 한칸 내려앉은 구조입니다. 동쪽 첫번째 방은 허세우의 침실입니다. 침실 한켠에 있는 나무침대에는 짚이랑 허름한 이불이 펴있고 침대머리에는 책상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 옆에는 침대식 의자와 작은 걸상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 거실은1924년 허세우가 첫째 부인과 결혼했을 때의 신혼방이였습니다. 1958년 남경 군관구 사령원이였던 허세우는 집에 들렸을 때 시종 이 어두컴컴한 작은 방에서 지내면서 모친 곁을 지켰다고 합니다.
두번째 방은 안방으로 직접 바깥 방의 객실과 통합니다. 이 안방 가운데는 검정색 관이 떡하니 놓여져 있고 그 옆의 벽에는 액자에 담은 세통의 편지가 나란히 걸려져 있었습니다. 관의 정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편지에 들어있었습니다.
"이 편지는 1979년 10월 22일 허세우가 맏아들 허광(許光)에게 쓴 것인데 내용인즉 현금 50원을 보낼 테니 본인을 위한 관을 사고 후사에 사용하도락 하라는 것이였습니다. 허세우는 특별히 아들에게 본인이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고향 어머니 무덤옆에 묻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편지를 받은 맏아들 허광은 부친의 소원대로 소나무, 삼나무, 떡갈나무, 버드나무, 측백나무 이상 다섯가지 나무로 관을 만들었습니다. 이 다섯가지 나무는 '5자동심(5子同心)'을 뜻합니다."
하늘의 조화일가요, 그뒤로 6년이 지난 후 1985년의 같은 날 즉 10월 22일 허세우는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관은 결국 사용되지 못한채 이곳에 남아 허세우의 토장(土葬)에 얽힌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중앙에서 화장(火葬)을 창도한 이래 허세우는 최초로 유일하게 토장이 허락된 국가지도자입니다.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의지하면서 동년을 보냈던 허세우는 일찍 참군해 모친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1959년 지형 고찰차 집앞을 지나다가 74고령의 모친이 땔나무를 하면서 분망한 모습에 허세우는 한동안 무릎꿇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중에 다망한 공무로 모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허세우는 사후 모친의 옆에 묻어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는 지도자 간부들의 화장실시에 관한 "창의서"에 사인하지 않았고 그때 중앙에서 특별히 허락해주었다고 합니다.
안방의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허세우 모친의 거실이 보입니다. 이 방의 벽에는 자애롭게 웃고 있는 허세우 모친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방의 벽귀퉁이에는 낡은 침대와 허름한 궤짝, 책상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방은 지세고 낮고 습해 노모가 생활하기에는 다소 열악한 환경이였습니다. 허세우가 산동군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 모친을 모셔가려 했지만 시골에서 늘 일만 하면서 살았던 모친은 한가한 생활에 습관되지 않아 결국 이 허름한 옛집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세번째 방의 문을 열면 바로 부엌입니다. 부엌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구멍이 뚫린 벽이 한눈에 안겨옵니다. "피비동(避匪洞)"이라 이름 지은 이 뚫린 벽은 허세우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말해줍니다.
"때는 바야흐로 1932년 허세우 장군이 모친 뵈러 고향으로 찾아왔을 때입니다. 반역자의 밀고로 허세우 장군이 있는 이 집이 백여명의 적들에게 포위당했습니다. 그때 허세우 장군은 손으로 벽을 격파해 구멍을 뚫고 지붕우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훗날 허세우는 이 경력을 회억하면서 본인이 '총칼을 맞고도 죽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지만 추녀와 담벼락을 나는 듯이 넘나드는 것은 진실이라고 했답니다.'"
맨손으로 벽을 격파하다니?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허세우니까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것이 허세우는 어렸을 때 가난한 집안 형편때문에 소림사로 가서 8년간 무술을 연마했던 것입니다.
이 부엌에는 부뚜막과 낡은 취사도구들이 진열되어 소박한 민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반 옛집을 둘러보면서 개국공신인 고급장교의 집이라 하기에 지나치게 검소하지 않을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옛집 서쪽켠의 진열실로 이동했습니다. 총 4개의 방으로 구성된 진열실에는 사진자료들과 허세우가 생전 사용했던 무기며 그의 저서, 기념휘장 등을 전시해 충성심과 효심으로 가득한 용맹한 장군의 일생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의 지난 투쟁사들과 검소한 생활상이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진열실에서는1938년 2월 위현(威縣) 남쪽 향성고(香城固) 매복전에서 200여명의 일본침략군을 섬멸한 허세우의 용맹한 기세도 볼 수 있었고 1948년 9월 부대를 이끌고 8일만에 산동성 정부 소재지인 제남성(濟南城)을 점령하고 국민당 적군 10여만명을 제거했던 혁혁한 공훈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해방후 남경 중산릉원 8호에서 생활할 때 그가 마당을 밭으로 갈아 밀이며, 옥수수, 고구마를 심고 가축도 기르면서 농가의 생활을 즐겼던 모습도 보입니다. 훗날 사람들은 허세우를 "베옷장군"이라 친근하게 부르기도 했답니다.
진열실 옆에는 모택동 주석 초상휘장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종류가 다양하고 형태가 각이하며 정교하고 소중한 모주석 초상휘장 1만295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두 허세우가 소장한 것으로 생전 전문 경비원을 배치해 이 휘장들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곳에 들어서면 모주석 초상휘장으로 만든 충(忠) 자가 한눈에 안겨오는데 이는 나라와 지도자에 대한 허세우의 일편단심이 역력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아담한 현급도시인 신현은 장군 허세우의 옛집을 품고 장군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중국 애국주의와 전통혁명기지로 오늘날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습니다.
글/사진: 권향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