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전번달이였을가, 신문에 실린 화술전문가 서방흥아나운서관련 인터뷰를 보고 참으로 시의적절한 기사라는 감이 들었다. 서방흥선생의 사진도 멋졌고 기사도 신선하다는 느낌이였는데 그중에서도 화술은 "시대발전의 요구"이고 말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자 인격이며 품위"라는 서선생의 정곡을 찌른 말이 특히 가슴에 와닿았던것 같다.
서방흥선생과 깊은 교제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서방흥선생과 관련해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아마 중한수교전후였을것이다. 어느 날 나는 신문사를 방문한 한국손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연길거리를 달리고있었다. 차내 확성기에서 연변방송이 흘러나오자 그 손님은 "여기서도 한국방송을 들을수 있나요?"
하고 나에게 의아하다는듯한 눈길을 주었다. 나는 지방방송이라 좀 겸연쩍어하면서 "아닌데요, 이건 연변방송인데요"하고 여쭈었더니 그분은 뜻밖에도 "표준말을 잘해서 서울방송으로 착각했다"며 아나운서의 화술을 진심으로 치하하는것이였다. 그때 그 아나운서가 바로 서방흥선생이였는데 그의 화술은 성량, 발음, 억양 모두가 그렇게도 흠이 없이 표준적이였던가보다.
그의 화술때문에 그때 그 시각 연변방송은 결코 지방방송이 아니였다. 그 시각 연길의 택시는 초라한 택시가 아니라 제법 우아한 택시였다. 그 시각 나는 지방신문사 무색무취의 언론인이 아니라 서울사람에게서도 흡잡을데 없다고 칭찬받는 수준급아나운서와 한도시에 사는 근사한 언론인이였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잊지 못할 감미로운 추억이지만, 쉽게 생각하면 이게 바로 말이 곧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고 품위라는 주장을 뒤받침해주는 생동한 사례가 아닐가 한다.
사람은 이렇게 말 한마디로 어깨가 으쓱해질 때가 있는가 하면 말 한마디로 형편없이 초라해질 때도 있다.
무슨 모임, 그것도 외국손님까지 정중히 모신 모임이라는데를 가보면 우리측 지도자의 발언에 어페가 나타나 민망할 때가 더러 있다.
이를테면 발언원고까지 들고나가서 하는 발언 첫마디가 "존경하시는"으로 잘못나가는 경우가 그렇다. 분명히 해당측 인사들을 존경해서 하는 발언이라 모두들 속으로 리해는 할것이다. 하지만 남을 존경하는것은 자신인데 자기에게 "시"자를 붙인다면 자기를 높이 모시는 꼴이 아닌가.
글자 한자, 토 하나를 잘못써도 후회막급의 실수를 저지를수가 있다. 말의 뉘앙스란 이렇게 민감한것이여서 사람을 울고 웃게 할수도 있는것이다.
오래전에 말수적은 한 동료한테서 이런 옛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해방초기에 어느 시골에 야학교를 다니는 할머니가 있었다. 야학을 다니지 않는 남편이 마음에 걸리였던지 어느 날 야학이 파하자 할머니는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도 그날 배운 "가갸거겨"를 가르쳤다. 할머니가 " '가갸거겨', 하시오.." 하고 따라 외우라고 하니 남편은 정색을 해서 " '가갸거겨' 하시오." 하고 따라외웠다. 곱씹어 배워줘도 쓸데없이 자꾸만 "하시오"까지 받아외우니 할머니는 기가 차서 " 그 '하시오'는 빼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남편은 그 " 그 '하시오'는 빼시오"까지 따라외우더란다. 실말같기도 하고 누가 묘하게 지어낸 이야기같기도 하지만 언어표현에 관한 교훈적인 옛말인것만은 분명하다. 말이란 함부로 떼고붙이고하는것이 아닌것이다.
이런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고장에서 적잖은 안해되는 분들은 자기남편을 "우리 나그네"라고 부른다. 그러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 정말 그 말의 원뜻대로 그 부인이 길가는 객(客)?길손, 외간남자와 산다고 해석된다면 경을 칠 일인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화술이라는것은 발음이나 억양뿐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확한 단어구사를 전제로 하고있는것이다. 아무리 억양이 좋고 목소리가 챙챙한 아나운서라고 해도 편집이 잘못써줘서 아나운서가 '택시'를 '택시차'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듣기가 거북한가. "봉사질이 낮다"를 "봉사질이 차하다"고 말하고 "감상"을 "흠상"이라며 표준말에 없는 말을 함부로 지어내말하기도 한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방송이나 신문간행물에서까지 무슨 "아버지질", "련인질", 무슨 "력도(강도)", "초상인자(투자유치)"같은 말이 넘쳐난다. 군더더기투성이에 틀린 말, 조선말에 없는 말까지 람발한다면 품위고 뭐고 뒤죽박죽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언어의 혼란시대가 온것 같다. 아마 이래서 서방흥선생이 언론의 각광을 받고있는것 같다. 서방흥선생이 몇몇 아나운서양성에 만족하지 않고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사생의 화술교육에 이어 화술교육의 대중화에 발벗고나선것은 참말로 지당한 처사이고 그것은 사실 전략적인 발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물론 너무 지나친 근심은 금물이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와 함께 한다. 고국과의 문화적련계와 상호방문이 활성화되였고 그들과 섞여사는 일상인데다가 신문, 방송뿐만아니라 텔레비죤, 인터넷까지 보급이 되여 언어환경이 바닥을 칠 정도로 렬악하다고 볼수만은 없는것이다. 화술의 가갸거겨공부는 우리 자신의 의도적인 노력여하에 달린것이고 어찌보면 우리 삶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서 새로운 언어계몽운동이, 화술의 야학교가 절실하다고 할수도 있는것이다.
무슨 경로를 통해서든지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유치원생, 소학생으로부터 로동자 농민 정계인사 교육자 문화예술인에 이르기까지?조선말을 사랑하고 조선말을 잘 습득하는 행렬에 동참하기를 기대해본다.
각개 분야에서 표준적인 우아한 언어로 활달한 의사표달이 이뤄지면서 우리의 삶과 경제문화교류가 한결 생산적이고 효과적인 방향으로 업그레이드되기를 바란다.
남녀로소 누구나 국내외손님들앞에서, 주어지는 마이크앞에서 주저심이 없이 당당하게 의사표달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출국로무자마다 언어시험에 무사통과되고 외국에 나가 면접시험을 받더라도 그들이 얼음에 박밀듯 대답에 거침이 없기를 바란다.
큰회의에서나 작은 회의에서나 참석자 모두가 정확하고 름름하고 겸허하고 조리정연하게 발언할수 있기를 바란다.
강단의 연사마다, 담판석상의 담판대표들마다 품위있고 존중을 받는 인격체로서 세상과 효률적이고 세련된 대화를 나눌수 있게 될 그날을 그려본다.
서방흥선생과 두터운 교분을 쌓지는 못했지만 나는 화술의 가갸거겨운동을 펼치는 그분의 주장에 공감하며 나 역시 나름대로 화술과 문필작업의 가갸거겨공부에 태만하지 않을것임을 정중하게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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