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일전에 고맙게도 민간문학가 김재권선생으로부터 민간이야기집 <황구연전집>을 선물받았다. 선생의 25년 심혈이 슴배인 력작, 한질 전10권, 양장본이였는데 나에게는 올해치고 제일 묵직한 선물이였다.
그 무게는 물론 권수나 근수를 론하는 물리적인 무게만을 뜻하는게 아니다. 책에는 보이지 않는 무게가 따로있다. 그것은 기실 양장본인지여부와는 관계가 없고 책의 권수나 페지수와도 상관없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28살의 꽃나이에 별세한 윤동주의 명시는 얇은 시집 한권뿐이여도 족하듯이 물리적인 량이나 무게만 가는 책은 무의미한것이다. 지적인 남다른 매력과 정서적인 항구한 감동의 유무, 거기에 담겨있는 저자의 로동가치만이 책의 무게를 가늠하는 척도로 될것이다.
어려서는 옛말에 침식을 잊거나 이야기책, 이야기그림책에 정신이 팔릴 때가 푸술했었지만 근년에는 어쩐지 순이야기책을 읽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허지만 황구연선생의 이야기만은 언젠가 꼭 읽어보고싶었다. 믿거나 말거나 사람에게는 어떤 감이라는게 있다. 일종 감응이라 해도 좋을것이다. 마침 전집이 나왔으니 나에게는 말그대로 급시우와도 같은 책이였다.
나는 전집 제1권을 펼쳐들고 제1편 "명기 황진이"부터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16세기 송도의 절세의 미인이요 재녀인 황진이의 일대기가 21세기를 사는 나의 눈앞으로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는 순간이였다. 수백년전의 사연들인데도 그 고전의 드라마는 신선한 감동으로 여울쳐왔다.
운문, 한학에 숙달한 경국지색 황진이가 서녀라는 사실, 그러나 그 불평등의 운명에 순종하지 않고 차라리 기적에 오르기를 자청하여 반항한 황진이의 인생출발부터가 례사롭지 않았다.
서녀출신으로 한 사나이한테 매여살기보다는 자유롭게 살면서 사나이들의 마음을 한겹한겹 열어보고싶었고 량반과 상놈이 무엇이 다른지를 따져보고싶었던 황진이는 본의아니게 이웃마을총각이 상사병에 걸리여 죽게 한다. 그녀가 선비, 송도류수, 서울의 당대명창, 재상의 아들, 왕손, 천마산 수도승, 형조판서대감과 교제를 하는 구수한 이야기들이 청산류수처럼 흐르다가 철학자 화담 서경덕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와서 이야기는 고조를 이룬다.
황진이가 사랑한 화담의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하다.
ㅡ가난한 집 아이였던 서경덕은 나물 뜯으러 갔다가 새새끼가 나는걸 본다. 첫날은 땅에서 한치를 날고 다음날은 두치, 사흘째되는 날에는 세치를 날다가 하늘을 날아다니였는데 서경덕은 새가 나는 리치를 생각하다보니 나물은 얼마 뜯지를 못한다.
ㅡ스물한살 때부터 그는 빈방에 홀로 앉아 여러날 침식을 잊고서 자문자답하며 3년을 지낸다. 그렇게 지내면서 병을 얻은대신 그는 도학, 경학대가로 된다.
ㅡ자신을 찾아와 학문을 배우려는 황진이에게 화담은 말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도 못다 배우는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자네는 성실이라는 두자의 참뜻을 모르고있으니 학문을 배우는것보다 지금의 생활을 마무리짓는게 더 중요해."
ㅡ깊은 밤 황진이가 모시겠다고 애걸해도 화담은 요지부동이다. "난 아직 할 일을 못다했네. 그날 일을 그날로 하지 않고 미룬다면 장차 빚더미속에 파묻혀 죽을게 아닌가?"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여내여
춘풍 이불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송도3절(자연으로는 박연폭포가 송도의 으뜸, 사람으로는 남자에 화담, 녀자에 황진이)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황진이와 흐트러짐이 없는 혜안의 화담사이에 얽힌 사연을 배경으로 하여 황진이의 명시를 다시 읽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나의 기대는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애절한 일대기의 긴 이야기를 짧은 이야기들이 받쳐준다. 발단과 결말이 잘 조응된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여 흥미로운 사연들이 종횡무진한다. 화담은 리상형지식인에 가까우나 불평등해소의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에 대한 황진이의 사랑은 진지하나 그것은 이웃마을총각과 상사한 짝사랑에 머물고만다.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며 깊은 계시를 주는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문학성, 지식성, 철리성이 강한 보물같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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