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정일
나는 평소에 자연에 무식한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 때가 많다. 모아산, 마반산을 지척에 두고서도 그 흔해빠진 새들과 나무, 풀, 버섯의 이름따위를 남들처럼 줄줄 외우지 못하는 무식이 안타깝고 면구스러운것이다.
추위가 영글어가는 겨울의 하루 우연히 학창시절에 읽었던 뚜르게네브의 《사냥군의 수기》를 재독하면서 나의 안타까움은 도수를 더해갔다. 렵총을 어깨에 메고서 때론 마차로 때론 도보로 로씨야 농촌마을들을 전전한 뚜르게네브의 자연관찰의 혜안이 나를 질리게 하였다. 슬픈 사연들을 다루면서도 가담가담 기막히게 아름다운 자연묘사를 등장시킨 작가의 박식과 감성이 놀라웠다. 포악한 지주와 불쌍한 농노들에 대한 구슬픈 이야기들이 나를 울적하게 하다가도 수림속 깨여나는 아침이나 노을 비낀 저녘 새들의 지저귐에 대한 황홀한 묘사가 나올 때면 나는 마치 장마뒤에 해님을 만났을 때처럼 환희에 넘치고 살맛나는 느낌이 들었다.
조용한 수림속 새들의 잠들 무렵을 뚜르게네브는 축제의 밤처럼 묘사하고 있다.
《먼저 잠드는 새가 있고 늦어 잠드는 새가 있다. 들어보라- 화계새들이 노래를 멈췄다. 얼마 안지나 휘파람새들도 잠잠해지고 그 뒤를 따라 후투새들의 노래도 사라진다... 새라는 새는 다 잠들었으나 류리새들과 작달막씩한 딱따구리들만은 아직도 잠에 겨운듯한 휘파람을 불더니 인제는 그들마저 잠잠해졌다. 다시 한번 사냥군의 머리우를 솔새의 류창한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고 어디선지 구슬프게 두견새가 소리치고 처음으로 꾀꼬리의 방울 울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지주들에게 이리저리 팔려다니면서 시집장가를 갈 권리마저 빼앗긴 농부들의 숨막힌 사연을 들려주다가도 이런 기막힌 조류축제의 묘사가 나올수 있다니 경이롭지 않은가. 《인류의 심령에는 옹근 대자연이 망라되여있다》는 산문대가 쁠리스윈의 말이 실감이 나는 대목이다. 새들의 지저귐이 아름다울수록 작품속 농부들의 무권리한 삶은 더욱 더 가슴저미는 고통으로 안겨온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도 대자연은 그렇듯 생동하고 찬란하다. 인간의 가난과 고통을 이겨내려는 뚜르게네브의 거룩한 정신이 세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새들의 황홀한 지저귐의 묘사를 낳은것이리라.
속도에 갇혀살며 자연과 멀어지는 현대인의 비애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나는 자신의 자연지식의 무지를 시인하며 뚜르게네브의 천재성에 탄복한다. 뚜르게네브의 수기에는 인생살이 희로애락의 한켠으로 동트는 아침이 있고 설레이는 수림이 있고 우짖는 새들이 있기에 더욱 큰 감동을 자아내는것이다.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도 자연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
언젠가 나는 라목이 많은 산중에서 응달에 무성한 소나무숲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해빛을 잘 받을수록 더 잘살텐데 왜 저 소나무들은 하필이면 응달에 모여살까? 더 어둡고 더 추울텐데 응달의 소나무는 왜 그렇듯 무성하고 독야청청할수 있을까? 하도 궁금해나서 나는 내가 <<생태박사>>라고 부르는 년하의 산행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친구의 현답은 명쾌하였다. 농민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심은것인데 응달에서 자란 소나무는 해빛을 바라며 우로 곧게 자라기에 쓸만한 재목으로 된다는것이다. 부식토도 응달의 부식토가 더 비옥하단다. 양지쪽의 나무는 해빛을 충족히 받기는 하지만 제멋대로 자라 땔나무로는 안성맞춤이지만 재목으로는 응달의 나무에 못미친다는것이였다.
또 하나의 경이로움이였다. 해빛을 좇아 우로 힘차게 자라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그 위기적상황때문에 응달의 소나무는 오히려 미끈한 우질목재로 된다. 나로선 금시초문인 아이러니요, 신비였다.
모르는 나무가 없어보이는 나의 《생태박사》친구는 응달의 소나무를 많이 닮았다. 안해가 외국로무자로 나간데다 은행직원으로서 밤당직을 서랴, 아들공부시발을 하랴 날마다 눈코뜰새없이 보내지만 몇년동안 등산팀 전화통지를 전담하고있고 산에 가서는 길안내를 도맡아한다. 그러면서도 언제 한번 얼굴을 찡그리는양이 없이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가 하면 아낙네들처럼 부지런히 산나물채집도 잘한다. 문학흥취도 대단한 그는 늘 푸른 소나무같다.
책속에 자연이 있고 자연속에 책이 있다.
이 겨울 나는 뚜르게네브의 떡갈나무와 봇나무, 후투새와 류리새들에 감사한다. 늘 가까이에서 자연을 보는 눈을 틔워주는 나의 《생태박사》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응달의 고달픔을 저주할대신 그것을 상상력이 있게 이겨내는 시들줄 모르는 생명력을 떠올리면서 나는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오늘도 눈내린 숲에서는 어떤 새들이 신나게 지저귈가? 쏴-하는 찬바람의 속삭임을 흰눈을 육중히 떠인 떡갈나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미상불 상쾌한 겨울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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