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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촉나라 승상- 제갈량
2010-07-19 10:22:01 cri

제갈량은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승상인데 본명이 량(亮)이어서 제갈량이지만 자(字)인 공명(孔明)으로 더욱 유명하다. 제갈량은 낭야양도(郎耶陽都), 그러니까 지금의 산동성 절수현(절水縣) 출신이다.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는 벼슬을 살다가 당시 황실이 썩은걸 알고 낙향해서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제갈량은 어렸을 적부터 사서오경을 비롯한 손자나 오자 같은 병법서를 배웠다. 당시는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없던 시기라서 벼슬길에 오르려면 병법서도 배워야 했다. 당시 읽어야 했던 책은 대충 논어, 맹자, 역경, 서경, 예기, 춘추 좌씨전 등이다. 제갈량이 학문을 익히는 방법이 달랐는데 그때 당시의 일반적인 학자들은 책 한권을 읽더라도 글자 하나하나 신경을 써 가면서 정독을 한 반면 제갈량은 그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통독을 했다 한다.

제갈량은 소년시절 부모를 모두 잃었으며 숙부를 따라 형주에서 살다가 숙부마저 전란으로 세상을 뜨자 형주의 남양 융중(南陽,隆中)에서 은거해 살면서 밭을 갈고 독서로 소일하며 생활하였다. 비록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제갈량의 재능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제갈량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숨은 용에 비했는데 그 후부터 제갈량은 와룡(臥龍)선생으로 널리 알려졌다.

207년, 당시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탁하고 신야를 지키고 있던 유비(劉備)는 서서(徐庶)한테서 제갈량을 천거 받았다. 제갈량이 살고 있던 초가집은 유비가 수비하던 신야에 약 75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는데 유비는 직접 세 번이나 찾아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이른바 유비의 "삼고의 예(三顧之禮)"에 응한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내놓았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화북"華北"를 장악한 조조(曹操)에 대항하여 한(漢)나라 왕실을 부흥하기 위해 강남에 할거하고 있던 손권(孫權)과 연합하고 형주와 익주(益州)를 확보하여 독립할 것을 권했다. 유비는 제갈량의 이 계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제갈량과 더욱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였는데 그 관계가 물과 고기의 관계, 즉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되었다.

208년 조조군이 남하하고 있을 때 유표가 병사하고 그 아들인 종(琮)이 항복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즉시 유비의 사자로서 손권에게 달려가 동맹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결국 적벽(赤壁)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천하삼분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유비는 형주장관이 되고 제갈량도 장사(長沙) 등 3군(郡)의 감독을 맡았지만 211년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 그 지방 장관인 유장(劉璋)과 대립하자 제갈량도 유비를 도와 촉나라에 들어갔고 214년 유비는 성도"成都"를 점령하고 익주장관이 되었다.

221년 촉한(蜀漢)이 성립되어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보좌하였지만, 223년 위독해진 유비는 후사(後事)를 제갈량에게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제갈량은 유비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할 것을 맹세하고 승상으로서 국사를 장악해 나갔다. 제갈량은 위(魏)나라로부터 중원"中原"을 다시 빼앗아 유씨의 한나라 왕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오(吳)촉_ 동맹을 굳히고 남쪽으로는 운남"雲南" 지역의 소수민족을 평정, 위무하여 후방의 불안을 제거함으로써 물자 보급을 용이하게 한 뒤, 227년부터 위나라에 대한 북벌에 전력을 다했다.

제갈량에 대한 일화중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할 때 올린 "출사표"와 장군 마속(馬謖)을 참한 일화가 유명하다.

226년 위나라 문제가 죽고 명제가 즉위하자 제갈량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북방을 정벌하려고 했다. 그 이듬해 제갈량은 출정에 앞서 제위에 오른 유비의 아들한테 역사적으로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올렸다.

"선제께서 창업하시어 반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뉘어 있고 익주는 피폐하였으니 이는 실로 생사존망이 위급한 때"라고 시작한 제갈량의 출사표는 우국충정을 토로한 천고에 빛나는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어 당시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울지 않는 사람은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란 말까지 돌았다.

제갈량이 휘하 장군 마속을 참한 일화를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고 하는데 즉 울면서 마속을 벤다는 뜻이다. 227년 위나라 장군 사마의(司馬懿)가 출병하여 가정(街亭)을 바라고 공격해 왔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제갈량의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하던 중 제갈량이 평소에 친자식처럼 아끼던 장군 마속이 사마의와 대결하겠다고 자원해 나섰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이에 제갈량은 마속에게 이런 다짐을 두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기의 지략만 믿고 싸우다 패하고 말았다. 제갈량은 군율을 어긴 마속을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인 228년 5월, 마속을 처형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張浣)이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제갈량은 이렇게 말했다.

"마속은 정말 아까운 장수요. 하지만 사사로운 정에 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 없이 처단하여 대의(大義)를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는 법이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읍참마속" 일화는 후세에 와서도 법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리고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 없이 버리는데 대한 비유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234년 제갈량은 오장원(五丈原)을 거점으로 사마의와 대치하던 중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천문을 살펴보던 사마의는 하늘에 붉고도 꼬리가 긴 별이 촉군의 진영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제갈량의 죽음과 촉군이 퇴각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번번히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전략에 낭패를 본 사마의는 혹시 이것도 제갈량의 계책이 아닌 가 의심하여 감히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하지 못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쫓아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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