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풀이
"一筹莫展"이 성구는 하나 일(一)자에 계책 주(筹)자, 없을 막(莫)자에 펼 전(展)자로 이루어 졌다.
뜻풀이
여기서 "筹"는 산가지라는 뜻이다. 옛날에 셈을 세는데 썼다. 계책이나 계획을 비유한다. 산가지 하나도 쥐여놓지 못한다는 말로서 아무런 계책도 내놓지 못함을 비겨이른다.
써볼만한 계책이 하나도 없다, 속수무책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성구이다.
유래
남송(南宋) 효종(孝宗) 10년 (기원 1173년), 온주(温州) 의 서안(瑞安)에 살고 있던 채유학(蔡幼学)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조정의 회시(会试)에 급제하여 당시 제일 나이가 어린 진사(进士)가 되었다.
이때쯤, 남송은 이미 조정의 법률과 기율이 쇠퇴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에 처해있었다. 특히 황제의 친척과 매국노들이 조정의 정권을 장악하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으나 사람들은 분노하면서도 대놓고 말은 못했다. 그때 재상으로 있던 장설(张说)이 바로 효종황제의 친척이었는데 그는 자기의 직위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기 일쑤였다. 부재상(副宰相)으로 있던 허윤문(虚允文)과 량극가(梁克家)는 장설의 권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전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조정의 정무는 완전히 장설 한사람이 장악하게 되었고 정치의 부패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찍부터 조정의 이러한 현상들을 전해들은 채유학은 격분하면서도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효종황제에게 조정의 실수를 비판하는 상서를 올렸다.
상서내용은 재상인 장설의 권세가 지나쳐 도리가 지나친 행동들을 하고있으니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상서문을 읽고난 효종황제는 조정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어린 진사가 함부로 조정을 비판한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언짢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장설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채유학을 강직(降职)에 처했다.
그해, 효종황제가 돌아가자 송녕종(宋宁宗)이 직위를 계승했다. 조정의 법률과 기율을 다시 바로잡으려고 결심한 송녕종은 조정에 대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말해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오래동안 감정을 억제해왔던 채유학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황제에게 상서를 올렸다.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가 되고싶다면 반드시 세가지 점을 명기해야 할것이옵니다. 첫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둘째는 재능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관직을 맡게할 것이며 셋째는 세수를 가감하고 백성들에 대해 너그러운 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옵니다. 이 세가지를 잘 해내려면 교화(教化)를 널리 알리는 것을 중요시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동안 여러방면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배척하려는 자들이 여론을 퍼뜨리고 다녔기에 조정을 위해 힘을 보태고저 하던 사람들도 행여 시비를 야기하여 불화를 당할까 두려워 나서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있사옵니다. 조정에는 학문에 뛰어난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쉽게 자신의 의견들을 말하려 들지 않을 것이오니 이런 상황에서 교육을 보급시켜 인재를 뽑지 아니한다면 어찌 사람들의 정신을 진작시킬 수 있겠사옵니까?"
채유학의 상서를 몇번이나 훑어본 녕종황제는 채유학의 학식이나 인품, 그리고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엿보고 내심 흐뭇해했다. 그래서 채유학의 관직을 다시 올려놓으려 했으나 재상 한규위(韩虬胃)의 극구 반대를 받았다. 한규위 역시 재능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질투가 심했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했다.
결국 채유학은 서울을 떠날수밖에 없었다.
"一筹莫展"은 바로 이 성구에서 유래된 말로서 속수무책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