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풀이
"不修边幅" 이 성구는 아닐 불(不)자에 닦을 수(修)자, 가장자리 변(边)자에 너비 폭(幅)자로 이루어졌다.
뜻풀이
이 성구에서 "边幅"는 천의 변두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옷차림새나 생활작풍을 가리킨다.
"몸치장에 게으르다", "겉치례를 하지 않다", " 소소한 예의범절과 형식에 구애되지 않다"는 뜻이다.
유래
동한(东汉)시기에 유명했던 명장 마원(马援)은 전국(战国)시기의 명장 조사(赵奢)의 후대였다. 그때 당시 조사가 큰 공을 세우며 마복군(马服君)으로 책봉되었기에 그의 자손들은 성씨를 모두 마씨로 고쳤다. 서한말년 승상 왕망(王莽)이 한효평(汉孝平)황제를 폐위시키고 왕위를 빼앗는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결국 얼마 안되어 천하대란을 초래했다. 왕망이 왕위에 올랐을 때 마원은 신성(新城)의 현령(县令)으로 임명되었다. 왕망이 패배를 겪고 도주하게 되자 마원도 서량(西凉)에서 유랑하는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서량에서 당지의 군사 수령인 외기(隗器)의 신임을 얻으며 그곳에 남게 되었다.
류수(刘秀)가 서울을 낙양(洛阳)으로 정했을 때, 천하는 분열에 처해있었다. 번숭(樊崇)이 이끄는 적미군(赤眉军)은 아직도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었고 사천의 왕이었던 공손술(公孙述)도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외기는 비록 서량에 웅거하고 있으나 중국을 통일할 능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어느 세력과 가까이 해야 할지를 두고 늘 고민했다.
어느 하루, 외기는 이 일에 대해 의논하고저 마원을 불렀다. 마원은 여러 세력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통해야만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원의 태도가 매우 신중하다고 생각된 외기는 그를 특사로 명해 고찰을 시켰다.
마원과 공손술은 한고향 사람이었다. 어릴적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사이라 그는 제일 처음으로 사천(四川)을 찾아갔다.
마원은 공손술이 오랜만에 벗을 만났으니 매우 기뻐하며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엄했을 뿐더러 외교사절을 접대하는 식으로 매우 정중하게 모시는 것이었다.
접견할 때에도 황제가 외출할때 입는 옷을 입고 병사들을 가득 배치해놓고 친히 마원을 영접했다. 공손술의 모든 행동이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진 마원은 매우 우습게 여겨졌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원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러 세력들은 모두 천하를 통일하려는 생각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를 끌어모으는 것인데 공손술은 아직 침식을 잊어가며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모으는 대신에 꾸미는데만 진력하니 어찌 인재들을 남겨둘 수 있겠는가"
공손술이 큰 일을 해낼 사람이 아니라는 판단이 든 마원은 사천을 떠나 류수를 만나러 낙양으로 갔다.
류수는 마원이 온다는 통보를 받고 바로 마원을 접견했는데 추호의 경비도 없었다. 마원은 의아하여 류수에게 물었다.
"폐하, 지금 천하를 통일하려는 세력들이 적지 않아 천하가 불안정하옵니다. 소인이 폐하를 뵈러 왔는데 어찌 아무런 경비도 취하지 않는 것이옵니까? 소인이 자객이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는 것이옵니까?"
그러자 류수는 마원이 찾아온 목적이 천하대란에 대해 얘기하려고 온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서 너는 자객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마원은 류수가 말이 통할뿐만 아니라 류방(刘邦)과 많이 닮았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에게서 왕으로서의 기품과 도량을 보아냈다.
서량에 돌아간 마원은 외기에게 류수의 세력에 가까이 할 것을 권했다. 후에 낙양으로 오게 된 마원은 군사방면에 큰 공을 세우며 류수로부터 복파(福波)장군에 임명되었다.
"不修边幅"는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성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