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작곡한 농민 작곡가 사장원(史掌元)
청취자 여러분, 중국의 북부 산서성 석양현(昔陽縣)에는 아흔살 고령의 사장원이라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는 오선보를 볼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반세기 남짓한 기간 줄곧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생활에 대한 사랑과 조국에 대한 깊은 정을 담은 2천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창작했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 50년대, 그가 창작한 노래 "행복의 노래 산기슭에 울려 퍼지네"는 중국 전역에서 크게 불려졌음은 물론 외국어로 번역되여 많은 나라들에도 전해졌습니다. 창작과 관련돼 뛰여난 기여를 한 사장원은 당시 국가지도자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의 접견을 받았으며 문화부로부터 농민작곡가라는 칭호까지 수여받았습니다. 계속해서 농민작곡가 사장원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음향 1 "행복의 노래 산기슭에 울러 퍼지네")
200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에 즈음해 이 노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싣고 다시 중국 방방곡곡에 울려펴졌고 노래의 작곡가는 다시금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습니다. 이 노래의 작곡가가 바로 사장원입니다.
사장원은 평생 고향인 산서성 석양현(昔陽縣) 리안양구(里安陽溝)촌을 떠난적이 없습니다. 세월은 덧없이 지나 어느덧 그의 온 몸에는 흘러간 세월의 흔적이 깊숙히 배여있었습니다. 하지만 새중국 건국60주년을 친히 겪을수 있어서 노인은 한없이 기뻤고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음향 2 )
"저는 이 년대에 생활할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농민 작곡가로서 사장원 노인은 우선 훌륭한 농민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은 이땅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장원 노인과 수십년간 인연을 맺어온 산서의 오랜 음악인 여중(呂仲)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음향3 여중의 말)
"사종원은 원생태의 농민 작곡가입니다. 그의 노래는 이미 전국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외국에서까지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람됨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난적이 없습니다. 이점은 정말 보귀합니다. 그가 오늘과 같은 성과를 이룩할수 있었던것은 생활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과 갈라놓을수 없습니다."
고향의 산과 물, 인정, 풍속은 모두 사장원의 창작 소재로 등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열정을 다해 창작을 견지했을뿐만아니라 촌의 업여극단 행사에도 직접 참가합니다. 그가 있음으로하여 촌의 문화생활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였습니다. 생산 노동 시간외에 노래를 부르는것으로 그는 생활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잊었습니다.
사장원 노인은 슬하에 12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한가족 14명의 식구들은 4무 되나마나한 땅에 의지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아이들이 많아 항상 유족한 생활을 누릴수가 없었는데 찌는듯한 여름이면 비좁은 온돌방의 무더위는 사장원 노인을 괴롭혔습니다. 사장원 노인의 노래는 바로 이러한 환경속에서 씌여졌습니다. 음악인 여중 선생은 당시를 이렇게 회억합니다.
(음향 4 여중의 말)
"저는, '매일같이 돌 캐는 힘든 일을 할라, 또 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울라 너무나 힘들텐데 언제 작곡을 하느냐고 물었지요. 그가 하는 말이 '정말 좋아서 한다'라고 답하더군요."
1959년, 중국문화부의 주최로 전국 업여가수 신작 콩클이 있었습니다. 주최측의 규정에 따라 가사는 반드시 곽말약(郭沫若)이나 주양(周揚) 선생이 같이 편찬한 "홍기가요"(紅旗歌謠)라는 시집 중에서 선정해야만 했습니다. "홍기가요"에 수록된 가사는 수천개였습니다. 농민출신의 사장원으로서는 가사 선택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수십번 시집에 수록된 시를 읽고 나중에 "행복의 노래 산기슭에 울러 퍼지네"라는 가사를 선택했습니다.
그후 사장원은 낮이면 노동을 하면서 어떤 악기에 어떤 절주로 표현할것인가를 구상했고 밤에 집에 돌아와서는 낮에 초보적으로 구상한 선률을 간단한 수자보로 기록해 놓군했습니다. 반복적인 연구를 진행한 끝에 그는 마침내 산서 기태(祁太) 앙가(秧歌) 선률로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농민들의 감격의 마음을 표현하기로 정했습니다.
(음향 5 )
"이 노래는 산서 민가의 기초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선률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노래로 표현…) '남산령, 남산 언덕을 오르네.'"
노래가 다 창작된후 사장원은 제일 먼저 촌의 합창팀을 청해 부르게 했습니다. 합창팀 성원들은 모두들 좋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하여 그는 이 작품을 산서성 업여가수 콩클에 올려보냈는데 이외로 우수작품으로 선정됐음은 물론 베이징에까지 보내졌습니다. 반년간의 평가 심사를 거쳐 사장원이 창작한 이 노래는 영예롭게도 전국 1등상을 수상했습니다. 노래는 전국을 상대로 중앙인민방송국에서 방송되였고 전국의 여러가지 간행물에도 실리는 등 파격적인 홍보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전국의 4억 인민들은 모두 방송을 통해 사장원을 알게 되였고 따라서 이 아름다운 선률의 노래도 전국인민들속에서 불려지게 되였습니다.
(음향 6 "행복의 노래 산기슭에 울러 퍼지네")
이 노래와 함께 지난 세기 60년대는 사장원의 일생중 가장 휘황하고 가장 소장할 가치가 있는 인생세월이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사장원에게는 전례없는 창작격정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선후로 "우리 마을에 오세요", "우리팀에 훌륭한 젊은이가 왔다네", "고향의 산과 물 참으로 아름답네" 등 현지인들이 널리 부르는 노래들을 많이 창작했습니다. 당시 문화부에서는 그에게 "농민작곡가"라는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1960년후, 사장원은 선후로 두차례나 베이징에 와 관련 회의에 참석했는데 당시 국가지도자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습니다. 첫번의 회의에서 사장원은 본인이 갓 창작한 새노래 "우리 마을에 오세요"를 불러 자신의 흥분된 심정을 전했습니다.
(음향 7)
"당시 저는 '이 노래는 금방 창작된 노래인데 불러드리겠다'고 말했지요. 노래를 다 부르자 주은래 총리께서는 일어서셔서 저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2005년 9월, 사장원 노인이 평생 알심들여 창작한 노래를 수록한 작품집 "농가신가"(農家新歌)가 세인들과 대면했습니다. 작품집에 수록된 2천여곡의 작품은 모두 사장원 노인이 노동의 여가 시간에 석유등잔 밑 또는 작은 온돌방에서 창작을 완성한 작품들입니다. 작품집의 출판은 반세기 남짓한 기간 사장원 노인의 념원이기도 합니다.
몇년전 상해의 한 예술단체는 사장원 노래 "행복의 노래 산기슭에 울러 퍼지네"라는 타이틀의 콘서트를 마련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장원 노인은 평생 가장 많은 10만원의 보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노인은 이튿날로 10만원을 전부 소학교를 건설하는데 기부했습니다. 노인의 만년의 생활은 여전히 검소합니다. 매번 사람들이 노인에게 어떤 소원이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주저없이 살아생전 자신이 창작한 작품 콘서트를 개최하는것이라고 답하군 합니다.
사장원 노인의 소원이 현실로 되고 만년에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프로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애청해 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다음주 같은 시간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