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10 10:44:40 | cri |
[편지왔어요]
남:편지왔어요, 이 코너에서는 여러분이 보내주신 따끈따끈한 사연들을 전해드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먼저 장춘의 김석찬 청취자가 보내주신 사연부터 만나보겠습니다.
한창송 송휘선생님: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청명절 추모식에 대한 소식을 알려 드리겟습니다.
금년은 세계 반파시즘전쟁 승리 70돌, 중국인민 항일전쟁승리 70돌을 맞이하는 해 입니다.
지난4월5일 청명절 날 우리 장춘애청자 애독자클럽 각소조대표10명은 우리클럽230명 회원을 대표하여 김수영회장의 인솔하에 추운 날씨에 보솔비를 맞아 가면서도 <장춘혁명 렬사 기념관>을 찾아 렬사 들을 추모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하여,항미원조 전쟁의 승리와 조국 해방 전쟁의승리를 위하여 싸운 이땅의 천천만만의 렬사들을 심심히 기리며 제일 먼저 <장춘혁명렬사 기념비>앞에 모여 꽃다발을 올리고 경례를 드리며 렬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었습니다. 우리들은 오늘의 행복은 그대들의 피와 생명으로 바꾸어 온 것임을 다시한번 돼새겼습니다. 이어서 우리 일행은 <항미원조 전쟁 승리 기념관>과<해방전쟁 승리 기념관>을 참관했습니다. 그런데 항일전쟁부분에는 아직도 <1945년8월15일 항일전쟁 승리기념>과 <1945년9월9일 국민정부 일본 투항 접수 의식>사진 두 장 만 있고 ,구체적 내용은 아직도 없었구요, 지금 한창 전시 준비 중 이라고 해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오늘은 이만 적습니다.
안녕히 장춘애청자애독자클럽 록원구소조 김석찬올림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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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석찬 청취자의 메일 접해보았습니다. 반갑고 감사합니다. 모두 잘 계시죠? 건강상황은 어떠하신죠? 환절기 건강관리 잘하시구요, 매일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재삼 기원합니다.
4월 5일 청명절을 계기로 혁명열사를 기리고 조상들을 기리며 주변의 지인들을 기리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래서 오늘 편지 사연들은 대부분이 이와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지난 주에는 훈춘시의 정창선 청취자가 채규억 선생에 관한 글을 보내주셨는데요, 오늘 또 장춘의 이종광 청취자가 채규억 선생을 기리며 적은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임직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특히 우리 청취자의 친근한 벗인 한창송, 송휘 아나운서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두분의 목소리는 청취자들에게 너무나 친근하기에 관심이 더 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 3월도 이미 지나고 청명이 다가왔습니다.
청명에는 열사를 추모해 열사비에 꽃을 올리고 술을 붓고 묵도하고 경례합니다. 저는 이런 활동에 참가하는 동시에 뢰봉과도 같은 고상한 정신을 지닌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써서 그를 기리려 합니다.
"장춘시 조선족노년협회 전임회장 채규억 선생 별세 1주년을 기리여"
채규억 선생은 통화사범학원 전임당위서기이며 길림 조선문 노인문고 주필, 길림장백산 잡지사 고문, 길림조선족중등전문학교의 시험 출제인 및 총감독으로 활약했으며 이직 후에도 장춘시 조선족노년협회 회장직을 맡았습니다. 채규억 선생의 일생은 당의 교육사업, 특히는 조선민족 교육사업에 헌신한 일생이었고 한평생 배움을 멈추지 않고 꾸준히 배우면서 인민을 위해 복무한 일생입니다. 그는 80이 넘은 고희에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고 활동하면서 황혼을 보람차고 눈부시게 장식하면서 살아온 우리 노인들의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장춘시 조선족 중노년인들은 채규억 선생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모두들 채규억 선생을 듬직하고 자애로우며 정청장급의 고위 간부였고 문학과 정치 수준이 높아 노인문고 잡지를 창간하고 주필을 담당했으며 우리 장춘시 조선족 노년협회 회장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 대해 모르는 면도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뜬 후 그의 학생이자 전우이기도 했던 김수영 작가가 쓴 ["저 하늘의 별과 같이"—채규억 은사님을 추모하여]란 문장이 2014년, 국가급 잡지 "중국민족"2기에 실렸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채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가 11년동안 뢰봉정신을 발양함 무상 지원, 자원 봉사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로써 더더욱 뭇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채규억 선생은 1989년부터 1999년, 즉 62세에서 72세까지 장장 11년이란 세월을 다른 직무를 역임하면서도 무더운 여름이나 북풍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도 마다하지 않고 어김없이 장춘 시내를 누비면서 가전제품 무상수리자원봉사를 해왔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엄지손가락을 내세웠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실입니다. 그는 11년간 해마다 평균 200여차례 봉사활동에 참가했지만 한번도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알리지 않았고 서민들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면서 자신을 인민의 공복으로 여기고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남을 위한 봉사를 즐겼습니다. 채선생은 그야말로 진정한 공산주의 전사이며 모범당원, 우리의 본보기가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또 한가지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2014년 1월 31일 채규억 선생은 87ㅅ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이에 앞서 채규억 선생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떠나고나면 아무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유언에 따라 그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장래식이 끝난 후에야 지인 몇분에게만 부고를 전했습니다. 떄문에 마땅이 성대히 치뤄야 할 영결식마저 갖지 못하게 됐습니다. 다른 분들의 떠들썩한 영결식에 비하면 너무 쓸쓸한 것 같지만 사람들은 이런 분들을 더욱 존중하고 더 오래동안 마음속 깊이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고 채규억 회장님, 고이고이 잠드시기 바랍니다.
장춘시 경제개발구 조선족노년협회
이종광 올림
2015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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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보내주신 이종광 청취자 고맙습니다. 지난주에는 정채선 청취자 그리고 이번주에 이종광 청취자가 보내주신 사연들을 쭉 이어놓고 보면 채규억 선생의 이미지가 보다 풍성해졌는데요, 이처럼 훌륭한 분들이 있어, 또 이런 훌륭한 분들과 함께 하는 여러분이 있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보다 더 밝아지고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에는 연변의 박철원 청취잡니다.
4일,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에서는 연길시 로인뢰봉반, 의란진대성촌 로인들과 손잡고 선렬기리기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올해에도 주덕해로주장의 가족이 되여 주덕해동지와 김영순동지 합장묘소에가 추모술을 부어 올리고 협회 주룡린부회장이 주덕해동지의 일생을 소개했습니다. 주덕해동지기념비에 추모행사로온 학생대표들은 이 특수한 로인성묘객들의 소행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어 일행은 의란진 대성촌(원 실현촌)에 위치한 <<28명렬사순난지>>를 찾았다. 순난지는 이미 부근촌 로인들이 말끔히 거두어 놓았었습니다.
애청자협회, 대성촌 촌민위원회와 대성촌로인협회에서 정성껏차린 제상을 마주하고 이 순난지를 발굴하고 건설하는데 심혈을 기울린 박덕환(88세)옹이 28렬사합장묘소에 깃든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원 동만특위서기였던 조기석(曹基锡1904---1932)등동지들은 대중을 이끌고 일제와싸우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1932년 음력3월7일 28명이 장렬히 희생당한 사적을 들으며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였습니다.
농민시인 심정호는 렬사추모시를 읊었고 군정대학출신인 김금옥, 로인뢰봉반반장 김봉숙, 조양천진의 문인 길중섭 등 이들이 감명깊은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이날 붉은 넥타이를 정중히매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나선 연길시중앙소학교 3학년2학급의 박우성학생은 동행한 중앙인민방송국 기자에게 "나는 오늘 내가 맨 붉은넥타이가 렬사들의 피로 물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하며 앞으로 훌륭한 인재가 되련다고 말했습니다.
행사를 하면서 몄몄로인들은 새로 건설되는 장춘--훈춘 고속철도선이 바로 보이는 기념지주변에 꽃씨도 뿌려 놓았습니다.
행사에 참가한 50여명 대표들은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를 숙연히 부르며 귀로에 올랐습니다.
아울러 4월5일 청명날, 연길시 로인뢰봉반반장 김봉숙의 집에는 특별한 제사상이 차려졌습니다.
2004년 연길시의 첫 뢰봉반인 "로인뢰봉반"을 창설하고 맹인김봉숙을 반장으로 지정하여 열심히 뢰봉정신을 전파하고 실천해온 한무길고문이 별세한후의 첫 청명절을 맞아 김봉숙반장은 자신의 저택에서 한고문을 기리는 제사상을 차리게 된 것입니다.
벽에 걸린 로인뢰봉반반기와 수두룩한 영예증서들이 바로 한무길로인의 업적을 빛내주고 있었습니다. 연변대학의학부 유체기증반공실 김범학주인도 전화를 걸어와 유체기증을 실천한 모범인물을 추모했습니다.
뢰봉반 대표들은 한고문을 추모하면서 그이의 유지를 받들어 로인뢰봉반을 시대의 앞장에서 달리는 우수한 집단으로 건설하리라 다졌습니다.
박철원
20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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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절과 관련된 사연 보내주신 박철원 청취자 고맙습니다. 청명절(清明节)은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절기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명절을 뜻하며 풍속과 기념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명절(清明节)은 음력 24절기 명절 중 하나이며, 동지로 부터 108일째 되는 날입니다. 주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러고 보면 이미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절기입니다. 청명절은 또 각종 농사를 시작하기 좋은 시점이라고 하며 성묘를 하는 등의 풍습이 있습니다.
청명절은 이미 2006년에 중국국가급 무형문화재에 등록되었습니다.
사실 청명이란 그 본의는 하늘이 맑고 땅이 밝다는 뜻인데요, 때가 양춘 3월이 되면 봄빛이 명미하고 초목에 새움이 트면서 생기가 발랄하여 청명한 기상이 감돌므로 사람들은 이 절기를 청명절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청명절이 되면 중국인들은 모두 여러 가지 형식으로 고인을 추모하고 벌초를 하며 그리움을 토로합니다.
옛날의 오랜 풍속으로 사람들은 이날 개자추 를 기념하여 불을 지피지 않고 찬밥만 먹었으므로 청명절을 한식절이라고도 했는데요, 이 풍속의 유래에는 매우 감동적인 역사적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기원전 636년 춘추 시대에
진헌공 의 애첩 여희가 야심을 먹고 태자 신생과 공자 중이를 모해하여 작은 공자 막제 를 왕위에 올려놓으려 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개자추 등 충신들은 곧 중이를 보호하여 진나라를 떠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어느날 그들은 위 나라의 깊은 밀림속에서 길을 잃고 허기와 피로에 허덕이며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중이가 이렇게 굶주려 죽게 되자 개자추는 산골짜기에 들어가 자기 허벅지의 살을 베어내고 캐어온 나물을 한데 넣고 국을 끓여 중이를 먹였습니다.
중이가 먹고나서 그것이 개자추의 살이었음을 알고는 감동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 영원히 이 "할고 봉군((割股奉君)"의 은혜를 잊지 않겠소". 그리고는 장차 왕위를 이어받게 되면 반드시 은혜에 보답할 것을 약속했다.
이에 개자추는 "신은 훗날의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로지 백성들에게 은덕을 페푸시어 청명한 군주가 되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간주곡)
여러분이 보내주신 청명과 관련된 편지 사연을 읽으면서 청명절의 유래 등에 대해서도 함께 짚어보았습니다. 녜, 이외에도 연변의 황룡술 신계숙 김화순 리청우 박일룡 김용필 김봉숙 김봉선 박철원 조경숙 박경양 리룡규, 이철수, 김화자 청취자 등 많은 분들이 4월의 퀴즈 답안 보내주셨습니다. 정답임을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녜, 지금까지 편지 사연 전해드렸습니다. 그럼 노래 한곡 듣고 퀴즈한마당에서 찾아뵙겠습니다.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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