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0 17:14:42 | cri |
[편지왔어요]
남: 편지왔어요, 이 코너에서는 여러분이 보내주신 따끈따끈한 사연들을 전해드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먼저 한국의 김연준 청취자가 보내주신 사연부터 만나보겠습니다.
여: 판다의 한국도착을 환영합니다
한중 우호 친선의 상징인 판다 낙보와 애보가 한국에 도착한 것을 환영합니다.
한국 놀이공원인 에버랜드에서 4월 부터 만날 수 있다니 기대가 됩니다. 저는 홍콩 여행시 오션파크에서, 사천지식경연 수상자로 사천을 방문했을 당시 판다보호구에서 판다를 관람한 적이 있어 더욱 기다려 집니다.
한중 우호의 상징인 판다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중국을 더 잘 이해하길 바라고 판다 낙보와 애보가 한국의 관람객들로 부터 큰 사랑을 받기 바랍니다.
경칩이 지나고 한국은 봄 기운이 완연합니다.
몇차례 비도 내려 가뭄이 해소되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도 바빠졌습니다.
중국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회의 개막식은 개인 사정상 생방송을 청취하지 못하고 CRI 홈페이지을 통해 일부 내용을 청취하였습니다.
장덕강 상무위원장이 개막식을 주재해 참석인원을 보고하고 개막을 선포하였으며 이어서 이극강 총리께서 정부업무보고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경제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저도 경제관련 내용을 관심있게 청취하였습니다.
국제적으로 경기침체 및 대내외 불리한 조건에서도 중국이 6.9%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뤄냈고 창업자와 취업자 수가 꾸준히 증가하며 도농간의 격차도 줄어 들어 국민의 생활이 크게 향상되는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습니다.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행정기능 간소화와 지방정부의 채무와 금리 부담을 줄여 주고 한국과 호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였으며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이 뚜렸한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민생복지를 포함한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혁신과 발전이 있었습니다.
전국정협위원중 조선족 출신 위원들의 활약도 두드러진데 이들이 제안한 여러 내용들이 잘 반영되어 지역과 사회의 발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중국의 박철원 청취자께서 연변조선어방송 애청자협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제작하는 문집에 저의 인사말을 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보잘것 없는 저의 글을 실어 주신다니 감사하지만 부족한 글로 인해 문집의 질을 떨어 뜨리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연변조선어방송 애청자협회 창립 10주년을 축하드리며 협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연준
***
남: 모니터 보고 보내주신 김연준 청취자 고맙습니다. 판다 소식을 보내주셨는데요, 귀여운 낙보와 애보가 현재 빠른 속도로 적응기간을 거치고 있다고 하니까요, 4월에 한국민들과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여: 그렇습니다. 애보는 애교가 많고 온순하고 낙보는 활발한 개구쟁이라고 하는데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잘 적응해서 원래 그 모습 변치 않길 바랍니다.
남: 이로써 한국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에 이어 중국이 판다를 제공한 14번째 '판다 보유국'이 됐습니다.
여: 그야말로 판다는 중국인들과 세계인들 사이에서 우호사절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명실상부한 국제 평화와 우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일전에 중국과 프랑스 수교 45주년에 즈음해서 쌍둥이 판다가 태어났잖아요.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남: 그렇습니다. 쌍둥이 판다에게 트루도 프랑스 총리가 손수 "기쁨이"와 "희망이"이라는 예쁜 이름까지 지어줘 이슈가 됐었죠. 애보, 낙보, 기쁨이, 희망이, 이름만큼 귀엽운 판다들이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랍니다.
여: 이어서 다음 사연 만나보겠습니다. 장춘 구태구 신립촌의 마경옥 청취잡니다.
남: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미 80고개에 오른 늙은인데 "3. 8" 여성의 날을 맞으니 웬일인지 한평생 우리 4남매를 고생 속에서 키워주시고 저세상으로 떠나가신 어머니 생각을 막을길 없어 이렇게 어머니를 기리는 글을 적어보내니 참작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님을 그리며"
2015년 12월 24일(음력11월 14일) 어머니 생신107주년이 되는 날이며 이 세상을 떠나신지 2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날을 기념하고 어머니를 회고하면서 남편과 함께 어머니 명복을 빌어서 건배하였습니다.
저도 아버지 어머니가 주신 생명을 받아 안고 이 세상에 태여나 살아온지도 어언간 어머님이 돌아가실때의 나이가 넘었습니다.
어쩐지 오늘따라 유달리 찹찹한 심정으로80여년간, 서로 다른 사회 서로 다른 시기마다 어려운 역경속에서 삶을 개척하신 어머니의 그 강직한 의력과 외강내유의 보통 조선족 여성의 기구한 인생살이를 살아오신 어머님;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가슴속에 엉키여 잊혀지지 않는 어머니, 초불처럼 그 한몸을 고스란히 불태우고 가정과 남을 위해 헌신한 공헌뿐, 오늘과 같은 행복한 나날을 맛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때 늦게나마 이 딸은 가슴이 찢어지는 애절한 심정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님을 추억합니다.
여: 한생을 고생하신 어머니의 인생 :
어머니는 1909년 한 빈곤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7살 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뒤이어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마저 여의고 외롭게 어머니 슬하에서 천신만고 생활하다가 19살에 한 중매군의 소개에 속히워 결핵병이 있는 한 남성과 결혼했는데 시어머니는 아들의 병이 악화될가봐 신혼부부를 동침못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결혼한지 1년도 못지나 남편이 사망하니 어머니는 가련하게 20살 꽃나이에 생과부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결혼 때에 중매군에게 지불한 경제대가로 홀로 있는 나의 어머니를 머슴처럼 꼬빡 삼년이나 부려먹었습니다. 삼년동안 천대란 천대는 다 받으면서 베를 짜서 시어머니의 상수까지 전부 마련해놓으니 그제야 자유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명은 왜 그렇게도 기구한지 타인의 소개로 11년이나 이상이고 전처 자식이 둘이나 되는 다시 만난 남편(나의 아버지) 역시 농사일은 커녕 오뉴월 삼복철에도 버선도 벗지 못하는 중한 위병 환자였습니다.
결혼한 사흘되는 날밤, 남편의 앓음 소리에 어머니는 가슴에서 돌이 뚝 떨어지는 것같은 심리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로 부터 어머니는 이 가정에서 봉건예절습관에 깊이 물든 시부모를 모시고 전처의 아들딸을 길러야 했으며 시동생 부부와 5년이나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다섯살 이상인 시동서의 천대와 기시를 받으면서 한입으로 다 말 못할 시집살이를 하여 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역경속에서도 말없이 시부모를 잘 모시고 병든 남편을 돌보는 어머니 처사에 크게 감동된 나의 할아버지가 며느리를 불러놓고 <<자네 고생을 내가 아네. 내 며느리라면 좀더 참아주게 >>라고 하셨답니다. 시아버님의 믿어줌이 어머니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가정이 비곤하여 비록 공부는 못했지만 도리가 명석하고 또 불가침범의 신조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바로 먹어야 옷 깃이 바로선다" , "솥이 검다고 밥이 검겠는가"고 생각하면서 어머니는 이렇게 마씨 가문의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자기의 신조를 굳게지키며 하나 또 하나의 애로를 헤가르며 그 괴로운 생활을 이겨나갔습니다. 농사일은 더 말할 것 없고 피곤한 밤잠을 이겨가며 베를 짜서 온 가족의 입을 옷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철 이른아침부터 밤을 새워가며 삼을 삼아 실을 뽑고 베를 짠다는 것이 당시 여성을 놓고 말하면 실로 간고한 노동이였고 지루한 시집살이였습니다.
남: 어머니는 내강 외유의 강직한 여성이었습니다.
노고에 지친 어머니는 무더운 여름철에 베틀에 앉자 베를 짜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땀에 온 낯이 범벅이 되여 돋아나온 땀띠가 함께 코에 모여 생긴 땀종이 염증으로 되여 코가 붉어졌으며 코가 헐어서 떨어질듯 했습니다. 하여 마씨 가문에서 인물고운 각씨라 소문나던 어머니는 그 땀종으로하여 복스럽던 코가 보기 흉한 빨간코로 변했으며 또 온몸에 돋은 땀띠가 한곳에 집중되여 피부에 염증이 생겨 고생했습니다. 그때 움푹 패운 상처흔적은 영원히 어머니 몸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몸은 잔페가 되면서도 어머니,안해 그리고 며느리란 신성한 직책을 감당하느라고 또 선량한 계모로 되려고 전실의 두오누이를 자기 낳은 친자식보다 더 살뜰히 보살펴 주셨습니다. 친어머니정으로 사랑해주며 키웠기에 그 딸은 "우리 어머니같은 계모는 세상에 둘도 없다"고 감격해 했습니다. 자신의 친아들은 낡은 옷을 기워입혀도 전실의 오누이 만은 산나물을 캐팔아서라도 언제나 계절따라 새옷을 해 입히군 했답니다.
이와같이 어머니의 무던한 인품이 널리 펴지게 살아가신 어머니의 고생이야말로 한마디로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심하였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감시가 가심했습니다. 자기보다 열한살이나 어리고 예쁘고 젊은 안해가 자신을 배반하고 탈가 할가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먼곳은 더 말할것도 없고 동네집에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구속했다고 합니다.
나의 할아버지가 마씨 가문의 둘째지만 무슨 영문인지 족보도 할아버지가 소지하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제사 생일 등 군일은 모두 우리 집에서 겪어야 하는데 이 모든 번다스러운 행사는 어머니 손을 경과해야 하니 몸이 아파도 누워있을 틈도 없었다고 합니다.
속담에 쥐구멍에도 해빛 드는 날이 있다더니 눈앞이 캄캄하던 어머니께도 광명한 새날이 있게 되었습니다. "8. 15" 해방과 더불어 우리 집도 토지를 분배받았고 어머니도 무거운 봉건쇠사슬에서 벗어났습니다. 아버지 중병으로 하여 생활은 다른 집에 비해 곤난하였지만 정치적으로 해방되니 몸은 날듯이 거뿐해졌습니다. 1951년 7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가냘픈 어머니 여성 노동력으로 연로한 할머니까지 일가로소 여섯식솔을 살리자니 그 고생이야 이를데 없었습니다. 이른봄 논갈이로부터 시작해서 가을 탈곡할때까지 어머니는 어느하루도 쉴새없이 별을 이고 밭에나가고 별을 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해방 맞는 해에 내가 열한살이였으니 어머니 고생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막내동생을 출산한지 이레만에 강건너 조이 밭가을을 하기 위해 추석이 지난 차디찬 날, 허리를 넘는 강물을 치마를 걷어올리고 건너 가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과도한 노고를 걱정하여 사망하기 전에 나를 불러 앉혀놓고 소학교는 졸업했으니 중학교는 가지말고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으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하늘이 당금 무너져 내려 앉는듯이 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하나 꼭 중학교에 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나는 가정의 반대에도 불과하고 가만히 중학교 진학 시험에 참가했는데 우리 동광촌 소학교45명 졸업생중 5명 합격생 중의 하나로 됐습니다. 어느 하루 어머니는 동광촌 여성 대표로 시에서 소집한 회의에 참가하시고 돌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글을 모르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더라" 고 공부못한 자기를 하소연하시면서 "여자도 글을 알아야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다. 내가 밥을 빌어먹더라도 너희들을 꼭 공부시키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에 붙었으니 계속 열심히 공부해 좋은 사람이 되라고 고무 격려까지 해주셨습니다.
여: 나는 어머니 말씀에 너무도 기쁘고 격동되여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 앞에 꿇어앉아 " 엄마,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공부도 잘하고 농사일도 힘껏 도울게요". 라고 굳게 맹세하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1950년12월 28일에 남 먼저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농망기에는 청가서를 내고 며칠씩 어머니 농사일을 도왔으며 어머니 따라 나무도 하고 매일 첫새벽이면 등잔불을 켜놓고 숙제했습니다. 고양이 발도 빌어쓴다는 볏모철이면 연변사범학교를 다니는 오빠가 자기 동창 7, 8명을 데리고 와서 반나절씩 모내기를 해 주었는데 그때 어린 마음에도 고맙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오빠는 1950년도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공청단 연변주위에 배치되여 사업하다 길림성 정부 단위에 전근되고 뒤이여 약혼녀도 대학을 졸업하고 길림조선중학교로 배치받게 되여 오빠는 길림에서 새 가정을 이루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연변1중에서 공부하는 나를 두고 두어린 동생을 데리고 길림 오빠집에 가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벌써 머리가 백발이 되였지만 자식들을 잘 돌보는 것이 부모의 천직이라는 신념으로 아들 며느리가 가정부담으로 하여 사업에 영향미칠세라 가사일을 담당하셨으며 손군 다섯을 모두 자신의 잔등으로 키워냈습니다.
" 우의 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 고 하시면서 이신작칙하여 가정화목을 도모하고 아이들을 잘 교양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항상 어머님의 고생스런 인생사를 돌이키며 지금의 행복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며 인성 교육에 중시를 돌리셨습니다. 어머니는 가정에서 뿐만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선량하게 대하고 도와 주셨기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애대를 받았으며 1970년에는 길림시 5호가정"五好家庭"의 영예도 안아왔습니다.
실로 어머니는 시비가 바르고 원칙성이 강하며 마음이 선량하기 한량없는 분이셨습니다.
젊은시절 쌓이고 쌓인 과도한 노고가 심한 다리병으로 잘 걷지 못하는 불치병이 되어 고생하시다가 1988년 7월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생전에 효도 못한 이 딸자식이 뒤늦게나마 구천에 계시는 어머님께 이 글을 올립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굳게 맹세합니다. 어머니의 강인한 의지와 고귀한 품성을 따라배워 길지 않은 여생길에서 보람있게 사람답게 어머니 딸답게 살겠습니다.
정겨히 잔을 부어 어머니 명복을 빕니다.
어머니 딸 경옥 올림
2015년 12월 24일
***
남: 눈물샘을 자극하는 사연입니다. 어머님께서 꼭 들으시고 위안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여: 그럼요. 저도 오늘따라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네요. 방송 끝나고 전화 한통 넣어드려야 겠어요. 사연 보내주신 마경옥 청취자 고맙습니다. 편지 쓰시면서 많이 우셨을 텐데요, 지금은 자신의 건강을 잘 챙기는 것이 어머니의 가장 큰 바램이고 어머니를 향한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건강관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연변의 김계순 청취잡니다.
남: 모택동 주석이 "뢰봉을 따라배우자" 제사를 쓴 53주년을 맞으면서 연길시 북산가 단산지역사회에 사는 김봉숙 할머니의 애심 사적을 방송을 통하여 많이 들었습니다.
베풀기를 즐기는 "뢰봉할머니"는 비록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뢰봉정신을 계승하여 문천대지진 때 결혼반지를 팔아 인민폐 1000원을 기부하여 현지인들을 울렸고 전국을 감동시켰으며 지난해 연변축구팀에 5000원, 고아 쌍둥이 아이들한테 해마다 1000원씩 보내주면서 맛있는 설 음식도 챙겨 주는 등 불쌍한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토록 흉금을 울려주는 감동적 소행에 "뢰봉할머니"는 사회 각계 많은 분들의 애대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혈혈단신인 "뢰봉할머니"는 고독할 사이 없이 설날 아침에도 "딸"이며 "조카","손자"들이 찾아와 세배를 올리고 아침상을 차려드렸습니다. 할머니는 이런 축복속에서 행복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런 감동적인 사실을 통하여 사랑을 베풀면 곤난은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배로 커진다는 도리를 알게 되였습니다.
저도 앞으로 "뢰봉할머니"의 뢰봉정신을 따라 배워 나자신과 가정을 위하는 개인주의 울타리를 벗어나 곤난에 부닥친 분들을 많이 도와주어 그들더러 봄날의 따사로움을 느끼게 하고 서로 서로 도우면서 남은 여생을 베풀며 살겠습니다.
2016년 3월 2일
연길시 신흥가두 민부지역사회 김계순
***
여: "베풀면 곤난은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배로 커진다" 참 좋은 말입니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자신이 한 모든 일은 우리의 목소리가 메아리로서 다시 돌아오듯이 고스란히 돌아온다고 합니다.
남: 그렇습니다. 그럼 판단은 자신에게 맡길게요. 이어서 다음 사연 만나보겠습니다. 연변의 박철원 청취잡니다.
여: 올해는 뢰봉 서거 54주년이 되는 날이고 3월 5일은 모택동 주석이 《뢰봉동지를 따라 배우자》는 제사를 쓴지 5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회발전의 새로운 시기에 특히 신뢰도가 보편적으로 내려가는 이때 어떻게 하면 《뢰봉 아저씨가 3월에 와서는 4월에 가는》난처한 국면에서 벗어날수 있게 할가? 《산 뢰봉》이란 무슨 뜻인가? 현시대에 뢰봉정신을 어떻게 이해하며 대대로 이어가겠는가 하는 문제가 화제로 되고 있습니다.
뢰봉은 호남 장사현 사람으로 어려서 고아로 되여 정부의 혜택으로 경로원에 수양되여 자랐고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자동차 운송병으로 근무했습니다. 고생속에서 자라난 그는 당시의 행복을 느낄줄 알아 근검하게 생활하며 끈질기게 학습했습니다.
물질문화생활이 풍요로운 오늘 근검절약은 여전히 보귀한 도덕이며 "작은 못 정신"으로 열심히 책을 보며 부단히 충전하는 것은 자신을 사회에 적응시키고 형세를 따르는 즉 시대적 인간이 되는 필수인 것입니다.
오늘날 무순,항주 등지에 규모가 큰 뢰봉전람관을 꾸리고 뢰봉을 홍보하는것도 현시대의 우리들, 특히는 청소년들에게 "뢰봉정신."을 전수하려는데 그 취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뢰봉정신의 실질은 무엇인가? 단순히 휴가일에 대합실에 나가 청소를 한다든가 재해지구에 돈 얼마를 자원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 언행의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바로 "애심"--사랑의 마음이 전제라 생각됩니다. 뢰봉이 제일 즐기는 어록이 바로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자"이지요.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고 친구를 따뜻이 대하고 자기의 직무에 충직하며 소년선봉대 보도원으로도 활약한 모든 것이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한다는 사랑의 마음이 앞선것 이지요.
자신을 키워준 당에 감사할줄 알고 자신의 모든것을 인민을 위하는 이사회에 기여하려는것이 바로 근본이지요. 이렇듯 "사랑의 기여"가 뢰봉정신의 실질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지금 매년 3월 5일을 "뢰봉학습일"로 정하고 뢰봉정신 학습 고조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연길시에서도 해마다 이날 기념대회를 가지고 모범 자원봉사자들과 선진집단을 표창하고 새로운 고조를 궐기하는 발기를 하며 선서도 진행합니다.
시 당위 선전부 시 정신문명판공실과 북산가두에서 주최하는 금년의 이날 대회의 시작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특별 창작한 신곡 "살아있는 뢰봉"이 조선어와 한어로 선보이게 됩니다.
"산 뢰봉"이란 바로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자원봉사자, 한어로 志愿者--志 자에 마음心자가 들어있고 愿자에도 마음 심자가 들어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앞서 기여를 비기는 시대 정신이지요.
어려운 사람에게 자기의 생활비를 갈라 보내주고, 무상으로 자기의 피와 골수를 바치고, 자신을 잃고 직책에 충직하며, 창신창조하며 조화사회건설에 앞장서는 이들이 바로 새시대의 뢰봉들인 것이다. "뢰봉정신"은 바로 조화사회건설의 원동력인 긍정에너지인 것이다. 올바른 인생관, 가치관으로 활력소를 선양하는 것입니다.
현시대 뢰봉들은 언제나 긍정적인 삶을 주도하여 나라의 개혁개방정책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홍보하며 기여하고 있습니다.
연길시 로인뢰봉반의 맹인반장 김봉숙 할머니는 늘 당과 정부에 감사할줄 알며 생활비를 당이 주는 혜택이라며 아껴쓰면서 불우한 학생들을 돕고 또 선봉적으로 기여하는 집단을 성원합니다. 그는 "돈"을 현금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남다른 생활방식과 가치관으로 "돈"을 내 것 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라 생각하며 "내 손에 있으면 종이장에 불과하고 수요되는 사람에게는 '보약'이 된다"고 말합니다.
뢰봉정신 따라배우기는 단순하게 돈 내미는 행위가 아니라 그에 따르는 마음, 사회에 주는 긍정에너지의 가치라 생각합니다.
공공버스에서 자리를 내어주고 길 건닐때 노인을 부축하고 근검절약하며 삭당에서 식사하고 남은 음식을 챙겨가며 공공도덕을 잘 지키는 등 일상생활의 예의범절과 존로애유, 존사애생, 옹군애민 등 행위는 모두 인간의 기본됨됨이라고 생각합니다. 베풀며 살고 인민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서 나라의 "두개 꿈"을 실천해나가는 행정에서 사람마다 "기여" 자신의 힘과 재부, 지혜를 더 빛나게 한마음 한뜻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조화사회에 바치는 "뢰봉정신"을 세세대대로 이어가자는 바램입니다.
박철원
***
남: 학창시절에 해마다 3월이면 뢰봉따라배우기 열조가 일군 했었는데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방송일을 시작하면서 3월은 양회의 달로 더 각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 그래요. 박철원 청취자의 말씀처럼 뢰봉따라배우기, 사랑베풀기는 3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관하게 누구에게나 몸에 베어있는 좋은 습관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보다 아름답고 조화롭지 않을까 생각케하는 대목입니다. 편지 감사합니다.
남: 그리고 항상 누구보다도 베풀기에 앞장서고 있는 김봉숙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 드립니다.
여: 감사합니다. 3월 뿐만이 아닌 일년 12개월이 뢰봉따라배우기, 선행 베풀기, 불우이웃돕기 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날, 이를 실천해나가는 분들이 보다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남: 그리고 연변의 리성복 청취자가 보내주신 "뢰봉절" 맞으면서 연변영예원을 찾아 자원봉사"를 했다는 소식도 잘 받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여: 그럼 계속해서 다음 사연 만나보겠습니다. 한국의 김대곤 청취잡니다.
남: 안녕하셨습니까 ?
중국정부의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 관련 청취소감 입니다. 전인대와 전국정협 제12기 4차회의 관련 방송을 관심있게 듣고 있습니다.
전인대 개막소식도 인터넷 생방송을 통해서 한창송PD와 송휘, 이명란 아나운서의 열성적인 보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조선어부의 진행자들 모두가 세련되고 여유있게 보였습니다.
3월 8일 방송에서 왕의 외교부장의 기자 회견내용을 청취하면서 중국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반도의 관련내용은 한국민들에게 예민한 내용으로서 앞으로 중국정부의 입장을 알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전 언론매체들은 왕의 외교부장 회견내용을 비중있게 다루며 베이징 특파원 기자들의 현지 취재내용을 상세히 전하고 있었습니다.
시사와 화제 시간에는 중국정부의 재정운영에 관한 소식과 설명을 한창송 아나운서 음성을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 양회에 연변대학 교수신분으로 참석한 길림성 박혜선 위원과 강옥 기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관심있게 청취하였습니다. 소수민족의 의지와 정책을 발굴하여 중앙정부에 건의하여 성과를 거두고있다는 내용과 함께 14번째 참석한 열성에 가슴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상세히 소개한 정협 부주석 신분으로 참석한 조선족 자치주 연변 대표로 활동중인 권정자 위원과의 인터뷰 내용을 상세히 알게 됐습니다.
두만강 삼각주 개발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내용에 주목하였습니다.
끝으로 이번 양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6년3월9일 울산에서 애청자 김대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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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적시적인 모니터 보고 보내주신 김대곤 청취자 고맙습니다. 편지를 접할 때마다 항상 반가운 분인데요, 환절기 건강관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녜, 지금까지 편지 사연 전해드렸습니다. 아직까지 연변의 황순금, 장춘의 최춘월 청취자 등 여러분의 편지사연이 대기하고 있는데요, 다음 주 방송에서 보내드릴 것을 약속드리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전해드리겠습니다.
남: 이어서 퀴즈한마당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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