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제(漢宣帝)시기 북방의 흉노족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늘 한조의 통치를 위협했다. 한원제(한선제의 아들)시기 흉노족인 호한야 선우는 형과의 권력쟁탈에서 승리하고 지위가 안정되자 장안에 다녀와 화친을 요구했다. 한원제는 흉노족과의 평화를 위해 한조의 공주 혹은 왕족의 딸을 뽑아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보내야만 했다. 결국 한원제는 미모가 단정한 궁녀를 시집보내기로 했으며 "흉노에 시집가는 궁녀는 황제의 딸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후궁에 전했다. 당시 후궁의 궁녀들은 민간에서 선발되어 들어온 미녀들로서 황궁에 일단 들어오면 조롱에 갇힌 새 신세가 되었기에 하루빨리 출궁할 것을 갈망했으나 본 국을 떠나 북방의 머나먼 흉노에 시집간다고 하니 다들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때 외모가 아릿답고 견식이 높은 한 궁녀가 흉노에 시집갈 것을 자원했는데 그가 바로 왕소군(王昭君)이다. 한원제는 기쁘게 받아들여 바로 날을 잡고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이 장안에서 결혼하도록 했다. 호한야 선우와 왕소군이 한원제에게 인사드리던 날 한원제는 처음으로 왕소군이 천하절색임을 발견하게 된다.
한원제는 왕소군의 모습을 보고 후회막심하여 그녀의 궁녀 초상화를 다시 한번 봤는데 그림과 실물이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궁녀들은 황궁에 들어온후 황제를 직접 만나지 못하며 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통해 황제의 선택을 기다려야만 했다. 모연수(毛延壽)라는 화가는 궁녀의 초상화를 그릴때 궁녀들이 뇌물을 바쳐야만 예쁘게 그려줬다고 하는데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아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던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한원제는 결국 대노하여 모연수를 사형에 처했다.
왕소군은 한조와 흉노 관원들의 호송하에 장안을 떠났다. 흉노에 장기거주하면서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에게 전쟁을 도발하지 말 것을 권고했으며 중원의 다양한 문화를 흉노에 전했다고 한다.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간뒤로 흉노와 한조는 화목하게 지냈으며 60여년간 줄곧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소군출새(昭君出塞)"는 한조와 흉노의 역사상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고 있다. 왕소군은 서시와 양귀비, 초선과 함께 중국 고대 4대 미녀로 불리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