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의 자는 중모(仲謨)인데 오군부춘(吳郡富春), 그러니까 오늘의 절강성 부양(富陽) 출신이다.
손권의 집안은 대대로 장강 하류에서 살면서 호족으로서 명성이 있었다. 조조 유비와 같이 동탁 정벌에 앞장서서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이 바로 손권이다. 손견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첫째가 손책(孫策)이고 둘째가 손권이다. 192년 손권의 아버지 손견이 죽고 200년 형 손책이 죽자 손권은 19세의 나이로 손씨 가문의 계승자가 되었다. 손권이 갓 태어 났을 때 사람들은 그의 얼굴상을 보고 모두 크게 될 인물로 보았다고 한다. 기재에는 손권의 "머리는 네모나고 입이 크며 눈은 파랗고 수염은 붉다"라고 적혀 있다.
손권은 조조, 유비와 대립과동맹을 반복하면서 장강 중하류지역을 기반으로 오나라를 세웠다. 208년 남하하려는 조조의 군대를 유비와 손잡고 적벽(赤壁)에서 격파하였고 자기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 유비와의 관계를 밀접히 하였다. 그러나 형주(荊州) 영유를 둘러싸고 유비와의 대립이 심화되자 다시 조조와 동맹을 맺고 유비의 무장 관우(關羽)를 공격하여 형주를 차지했다. 그 뒤 위(魏)나라의 문제(文帝)가 나서서 오왕(吳王)으로 봉하였지만, 222년 독자적으로 연호를 황무(黃武)로 정하고 독립을 표방하였다. 유비가 죽은 후 손권은 촉(蜀)나라와 동맹하여 위나라와 대립하였으며 229년 황제 자리에 올랐다.
손권은 인재 등용에서 뛰어난 군주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손권의 형인 손책은 임종을 맞을 때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군사를 이끌고 싸우는 것이라면 내 쪽이 더 낫겠지만 그러나 현자를 발탁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일은 네가 더 훌륭하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손권은 형인 손책의 유언대로 나라 창업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문무가 겸비한 인재들을 등용했다. 손권의 중신들 중에는 오나라 정권 창업을 돕고 손권을 보필해온 주유(周瑜), 손권에게 강동을 정립하고 제왕의 대업을 서서히 도모하는 방략을 바쳐 손권의 공경을 받은 명장이며 모사인 노숙(魯肅), 손권이 황제로 된 후에 상장군으로 되여 태자를 보좌한 지모와 용맹을 겸비한 명장 육손(陸遜), 주유를 수행하여 적벽에서 조조를 대파함에 있어서 용감하고 지략이 있어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온 장군 여몽(呂蒙), 식견과 담략이 뛰어난 태사자(太史慈), 손책에 이어 계속 손권을 잘 보좌해 손권이 사부의 예로써 대해 왔던 장소(張昭) , 부하 백기만 거느리고 조조의 군영을 야습하여 조조군을 크게 놀라게 한 용감무쌍한 감녕(甘寧) 등이 있다. 이밖에도 황개(黃蓋), 정보(程普) 반장(潘璋), 서성(徐盛), 정봉(丁奉) 등 용장들이 손권의 막하에서 용맹을 떨쳤다.
손권이 이런 중신들을 발탁해 두터운 신임을 주었기에 오나라는 전란 속에서 나라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또한 손권은 지형의 이점을 살린 토지정책을 실시해 중국의 강남지역 개발에서 큰 기여를 한 황제이다. 일반적으로 오나라는 지형의 이점을 잘 살린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손권이 지배한 장강 중, 하류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량이 풍부해 농사짓기에 알맞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자원이 풍부해 철강, 방직, 제염 등 특산물도 많이 생산되었다. 그렇지만 한 때는 미개척지가 많았고, 인구도 비교적 많지 않았다. 그러나 후한 말 북방에서 전란이 계속되고 황하 유역의 경제가 타격을 받아 북방에서 이민들이 강남을 바라고 내려왔다. 때문에 손권의 중신들 중에는 장소, 노숙, 제갈근 등과 같은 북방 출신이 많다.
손권도 조조처럼 둔전제를 실시했다. 이러한 풍부한 경제력이 오나라의 군사력을 담보해 주었다. 또 장강이나 바다를 중심으로 한 수로가 많았기 때문에 교류무역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조선업도 발달했다. 조선업에서 오나라는 삼국시대에 가장 발달한 나라로 되였는데 조선업의 발달은 일찍 낙후했던 장강유역의 경제가 황하유역의 경제를 앞서는데 큰 역할을 놀았다.
역사학자 범문란(范文瀾)선생은 황하와 장강 유역의 경제 발전은 중국 봉건사회의 경제실력이 강화되게 하여 당나라시기 경제번영에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이밖에도 손권은 장강유역의 경제발전을 추진하면서 항해업을 발전시켜 당시 이주(夷州), 지금의 대만과의 연계도 강화했다.
그러나 오나라는 계승자 선택에서 비극을 초래했다. 손권은 손화를 태자로 세우고 동시에 동생 손패를 노왕으로 봉하고 태자와 동등하게 대했습니다. 때문에 신하들은 손화파, 손패파로 갈라져 싸우게 되였고 오나라에서 권력쟁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게 되였다. 이 권력 싸움에서 유능한 신하 수십 명이 처형되었다.
252년 손권은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은 손량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