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서예를 서법(書法)이라고 한다. 서체의 발달사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는 왕희지(王羲之) 의 등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희지 등장으로 서법이 단순한 문자 기록이 아닌 하나의 예술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다.
왕희지는 낭야림이(瑯邪臨沂) 출신이며 자는 일소(逸少)이다. 원제 때 우군장군(友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를 지내 흔히 왕우군(王友軍)이라고도 한다.
왕희지는 7살부터 서법을 배웠는데 그의 계몽 스승은 왕희지의 숙부이다. 그 후 왕희지는 이모인 위부인(衛夫人)한테서 서법을 익혔다. 동진시기 유명한 서예가인 위부인은 왕희지가 커서 서예 예술가로 그 지위를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왕희지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재주가 널리 알려져 많은 조정의 권신들은 그를 벼슬자리에 천거했다. 그러나 왕희지는 권신들의 권유를 완곡히 거절했다. 그가 관리로 되는 것을 거절한 이유는 당시 조정의 부패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희지는 높은 관직을 포기하고 북방으로 가서 검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호젓한 지방으로 가서 순박한 백성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속세에 물들지 않는 소탈한 왕희지의 성격과 태도에 대해 시인 이백은 "왕우군"이라는 시에서 "우군은 본래 맑고 진실하며 풍진 속에서도 소탈하다."고 읊었다. 왕희지는 45살 나던 해에 우군장군과 회계내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그가 간 곳은 전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풍경이 수려한 곳이었다. 산수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명사들이 찾아들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정치가 사안(謝安), 도사 허순(許詢), 승려 지둔(支遁) 등이 있다. 왕희지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연회에 참석했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왕희지는 난정 주변의 산수의 아름다움과 자신의 정감을 글에 남았는데 그 글이 바로.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천하제일 글"로 평가받는 "난정집서"는 왕희지의 대표작이다.
여기에 이런 일화가 있다. "난정집서"는 왕희지가 취중에 쓴 글이라고 한다. 술기운이 가신 후 왕희지는 취중에 쓴 "난정집서"를 보고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멋진 글이었다고 무릎을 쳤다고 한다. 또 이런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왕희지의 서체를 특별히 좋아했던 당태종은 왕희지 서예작품을 즐겨 감상했다. 당태종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아들 고종에게 명하여 왕희지의 "난정집서"를 순장품으로 소능(昭陵)에 묻게 했다고 한다.
중국의 서법사에서 서법예술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 서성(書聖)으로 추앙받아온 왕희지의 글씨는 정신과 기교가 조화를 이루어 수려하고 우아하면서도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어 사람들은 그의 서체가 신선의 기운이 갖추어져 있다고 칭송했다.
왕희지의 서체는 예술로 승화되어 감상의 대상이 될 만큼 그 위치가 확립되었는데 행서와 초서는 지금까지도 왕희지 서법을 유일한 규범으로 삼고 있다. 왕희지 작품으로 해서의 "낙곡론(樂穀論)", 행서의 "난정집서(蘭亭集序)"와 "상란첩(喪亂帖)", 초서의 "십칠첩(十七帖)" 등은 특별히 유명하다.
왕희지한테 서법을 배운 일곱 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는 커서 유명한 서법가가 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왕희지 부자를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