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한경(關漢卿) 중국 원(元)나라 초기의 희곡작가이다. 호는 이재수이고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 출신이다.
관한경은 원잡극 작가로서 60여 편의 잡극 대본을 창작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두아원(竇娥寃)", "옥경대", "구풍진", "망강정", "배월정", "단도회", "노재랑", "호접몽", "쌍부몽" 등 14편이 있다. 관한경의 현존하는 작품에는 잡극 외에도 산곡으로 투곡 10여 투와 소령 50여 수가 있다.
남송이 망한 후 그는 원나라시기 남방의 잡극 창작과 공연의 중심 도시였던 항주와 양주 등지를 유람하였다. 그는 가무에 능했고 음률에 정통했으며 많은 잡극 대본을 썼을 뿐만 아니라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기지가 넘치고 유모아적이며 박식한 관한경은 시를 읊고 붕소를 불며 춤을 추고 장기를 두며 사냥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재간을 가지고 있다. 관한경은 장기간 큰 도시에 살면서 황실병원에서 임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의술에 대해 별로 흥미가 업고 극본을 쓰는데 아주 열중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잡극"이라고 하는 희극이 유행되었다. 잡극은 내용에서 민간 설창(說唱) 이야기를 풍부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을 널리 반영하였으므로 고관, 귀인과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관한경이 쓴 잡극은 귀족들의 심심풀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고통을 풀기위한 것이다.
당시 원나라는 정치가 암흑하고 부패하며 사회가 불안정하고 계급, 민족 갈등이 첨예했으며 억울한 안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관한경은 사회최하층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더없이 동정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사회 최하층에 들어가 백성들의 생활을 요해하였다.
관한경은 민간언어를 익숙한 동시에 탁월한 예술적 수양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창작에 활력을 부여했다. 당시 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다. 관한경은 늘 그들과 어울렸고 지어는 직접 연출하고 무대에 올라 공연하였다. 그는 작곡한 노래에서 "나는 찌고 삼고 때리고 볶아도 익힐 수 없는 구리완두이다."라는 언어로 자신의 억세고 정직한 인격을 묘사하였다.
관한경의 잡극은 봉건통치의 암흑하고 잔혹하고 부패함을 폭로하였으며 원나라시기 최하층인 빈곤층, 특히 최대의 희생자였던 여성의 숙명적 고뇌와 당시 세태의 비참한 측면을 다루었다. 문체는 백화 속어를 많이 썼으며 그의 작품 전반을 통해 호방하고 비장한 정취가 흐르고 있다. "두아원"은 관한경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두아란 여자를 마음에 둔 악인은 강제로 그녀를 차지하려 하였고 말을 듣지 않은 두아는 결국 무고를 당해 관아에서 누명을 쓰고 참형을 당한다는 억울한 이야기다. 참형이 집행되기 전에 두아는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맹세했다. "내가 죽은 후 피가 저 높이 걸려 있는 흰 비단 위로 튈 것이며 유월에 눈이 내리고 3년 동안 크게 가물어 내 원한을 분명히 보여 줄 것이다." 과연 이후에 그녀가 말한 대로 들어맞았다. 3년 후에 관리가 돼서 돌아온 아버지가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두아의 한 맺힌 원한을 풀어주었다. 예로부터 봉건시대의 제왕은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이요 땅 위의 존귀한 존재라 여겼다. 하지만 관한경은 두아의 입을 빌어 형장에서 하늘과 땅, 불공평한 사회에 대해 기탄없이 폭로와 질타를 가했다. "두아원"은 700년 동안 공연되었으나 아직도 그 인기가 여전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관한경이 잡극에서 부각한 인물형상에는 부아와 같은 최하층 여성 형상이 있는가 하면 암흑한 봉건세력을 대표하는 추악한 인물형상도 있으며 관운장 같은 영웅형상과 청렴한 관리 형상도 있다.
관한경은 희곡발전에 큰 역할을 놀았다. 그의 작품 가운데 이상색채를 띠고 있는 사실주의 정신은 후세에 널리 전해져 중국 희곡역사에서 하나의 이정비로 되였고 그 자신은 위대한 희곡가로 역사의 한 폐지를 수록했다. 관한경은 세계 문학사에서도 높은 성망을 가지고 있으며 "동방의 세익스피어"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