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회] 세월을 관통하며 거리감을 좁혀 온 중국의 전파
청취자 여러분, 지난 12월 3일은 중국국제방송국 개국 70주년이 되는 날이였습니다.
세계 반파쇼전쟁의 초연속에서 탄생한 중국국제방송국은 오늘 61개 어종을 이용해 세계를 상대로 방송하는 국제미디어로 성장했습니다.
지난 70년동안 중국국제방송국은 여러나라 인민에게 문안과 친선을 전달하고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고 수호했으며 다원화 문명을 소중히 여기고 준중했습니다.
그럼 이 시간에는 "세월을 관통하며 거리감을 좁혀 온 중국의 전파"라는 제목으로 지난 70년간 중국국제방송국이 걸어온 행정을 돌이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음향1 국제방송국 개시곡 혼합)
지난 세기 40년대초 중국인민은 가열처절한 항일전쟁을 진행하면서 일본침략자의 공격에 맞서 싸웠습니다.
항일을 선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당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소재지였던 중국 서북부의 연안(延安)에서 연안신화(新華)라디오방송국을 창건했습니다.
1941년 12월 3일 이 방송국은 일본어방송을 개시했는데 그 대상은 중국에 있는 일본침략군이였습니다. 일본어방송의 첫 방송원은 중국에서 생활하던 일본의 반전인사 하라 키요시 여사였습니다.
이날은 중국국제방송국의 탄생일로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방송실은 초라한 움막집이였고 송신출력도 300와트밖에 안되었지만 그러나 이날부터 중국의 하늘상공에는 외국인을 전파대상으로 하는 외국어방송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라 키요시 여사는 이렇게 회억합니다.음향2
"저는 연안에서 사업했습니다. 당시 연안의 동지들이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연안의 움막집에서 전파된 하라 키요시의 방송은 일본군의 사기를 와해시키는 큰 무기로 되었습니다. 수많은 일본군 장병들이 방송을 듣고 전쟁의 진상을 알게 되어 반전사업에 참가했습니다.
1947년 신화방송국은 제2의 외국어방송인 영어방송을 개시했습니다. 오늘에 와서 중국국제방송국 영어방송은 전세계를 커버하는 방송으로 성장했습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습니다. 이날 본방송국여 방송원 정일람(丁一嵐)이 천안문성루에서 개국 기념행사 생방송 사회를 담당했습니다. 그후 정일람은 중국국제방송국 국장을 담임했습니다. (음향3 개국기념행사 방송음향)
새중국의 탄생과 함께 신화방송국도 수도 베이징으로 이전했으며 방송국명을 여러번 바꾸어오며 지금의 중국국제방송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통용언어로 널리 사용되는 있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만 아니라 개별국가와 민족만 사용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어, 파슈토어, 싱할라어 등 비통용언어도 중국국제방송국에서 전문 방송채널과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다.
중국국제방송국은 61개 언어로 세계에 뉴스를 전파하면서 언어 배후의 국가와 문화에 대해서도 두터운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하면 본방송국 방글라데시어방송은 개국 40여년동안 중국의 친선의 목소리를 전하는데 주력해 왔습니다.
수많은 방글라데시 청취자들은 중국국제방송국의 방송을 들으면서 소년시대로부터 중년에 접어들었으며 방글라데시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중국 방송원들과 깊은 우정을 맺었습니다.
이미 퇴직한 본방송국 방글라데시 방송원 석경무(石景武) 선생은 평생을 대외방송사업에 이바지했습니다. 그는 방송을 접하는 현지인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민족언어로 방송하는것은 방글라데시 문화에 대한 최대의 존중으로 된다고 말합니다. 음향4
"방글라데시는 인구는 많지만 나라는 작습니다. 방글라데시인들의 눈에서 중국은 대국입니다. 이들은 중국이 세계 모든 나라들을 준중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글라데시어를 배우고 또 방글라데시어로 방송을 하고 있는데 대해 이들은 감동을 금치 못합니다. 청취자들은 보내온 편지에서 이 점을 자주 강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