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회] 중국의 첫 위글족 원사(院士)- 후수르.이스라므
청취자 여러분, 중국 신강위글자치구에서 컴퓨터로 위글, 카자흐, 키르기즈 문자를 처리해본 사람이라면 후수르. 이스라므 교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또한 모두들 진심으로 이 70세 고령의 위글족 노인을 존경한다고 합니다.
후수르.이스라므 교수는 신강대학 정보과학.공정학원의 교수인데 지난해말에 중국 공정원 정보.전자공정학부 원사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교수는 중국의 첫 위글족 원사입니다.
그럼 이 시간에는 후수르.이스라므 교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간주
2002년에 처음 민족어 원고처리시스템을 사용하던 때를 회억하면서 신강인민라디오방송국의 인와르 엔지니어는 이렇게 감명깊게 말합니다. 음향1
" 후수르.이스라므 교수에게 경의를 표시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의 창구를 개척해주여 훌륭한 기초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과거 손으로 써서 원고를 작성하면서 수공으로 하던 일을 지금은 인터넷, 컴퓨터의 방식으로 대체하여 우리 업무에 큰 편리를 제공했습니다."
후수르. 이스라므 교수는 이리(伊犁)지역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그는 20세기 60년대 초에 대학에서 물리를 전공, 졸업후 카스(喀什)사범학원의 교사로 배치받았습니다.
1981년 후수르 교수는 신강대학으로 전근되었는데 그해 그의 나이는 40살이 되었습니다. 1982년과 1984년 신강대학에서는 후수르 교수를 선후로 베이징과 상해의 대학에 보내 컴퓨터 공부를 하도록 했습니다.
두차례의 연수는 후수르 교수의 인생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컴퓨터영역에 진입한후 그는 민족어 원고처리를 컴퓨터화 할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음향2
"이전에는 컴퓨터를 본적이 없었지요. 컴퓨터를 도입한후에도 이를 아주 신기한 것으로 생각하고 누구도 감히 이 최첨단의 설비와 도구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시기 컴퓨터는 영문을 기초로 개발, 그후 우리 국내에서 중문정보처리 시스템 연구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컴퓨터는 우리들의 업무 자동화와 편리화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정보기술의 시대에 진입한후 나는 위글어, 카자흐어, 키르기즈어 등 소수민족문자정보도 컴퓨터로 처리할수 없을가 생각했습니다. 상해교통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저는 날마다 이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실험과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문자의 정보화시대 진입은 선례가 없어서 후수르 교수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창조적 노동을 이어갔습니다.
후수르 교수 앞에 놓인 도전과 난제는 기술면의 문제만 아니였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언어와 문자 학습이였습니다. 그는 소학교때부터 위글어를 배웠고 한어는 대학에서 1년만 배웠습니다.
그러나 20세기 80년대 많은 컴퓨터 자료는 모두 영어 또는 한어로 된 것이여서 그는 하는수 없이 연구를 하면서 영어와 한어를 공부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음향3
"저는 소수민족입니다. 그래서 한어와 영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위글어와 카즈흐어, 기르기스어 등 소수민족문자 정보처리는 한어문과 영문의 처리방식, 기술과 아주 큰 구별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봉착한 제일 큰 난제였습니다."
후수르 교수의 연구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신강대학은 인민폐 3만원의 연구경비를 조달하여 컴퓨터 한대를 구입했습니다. 이 컴퓨터는 이 대학의 첫 컴퓨터였다고 합니다. 20세기 80년대 후수르 교수는 동료들과 함께 DOS시스템 등 난관 돌파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후수르 원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개발한 위글어 버전의 Windows는 아주 특별한데요, 미러 버전의 윈도(window)시스템이라고 부릅니다.
"시작" 버튼이 화면의 오른쪽 모퉁이에 있으며 모든 아이콘은 화면 우측으로부터 좌측으로 배열했습니다. 아이콘을 클릭하면 안내창이 우측에 뜹니다.
1986년 4월, 신강위글자치구 정치협상회의와 인민대표대회에서 후수르 교수 팀이 개발한 중대한 성과가 정식 사용에 투입되었습니다.
다어종 회의관리시스템을 개발했는데요, 민족어로 회의대표의 이름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대표의 증명서번호, 투숙호텔 방번호 등 정보를 검색할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 개발 성과는 현지정부와 신강대학의 높은 중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치구 과기술청은 당장에서 인민폐 11만원을 조달, 연구개발비용으로 쓰도록 했습니다. 후수르 교수의 연구팀은 이 자금으로 "조금이나마 고급적인" 컴퓨터 3대를 구입했습니다.
신강대학 정보.공정학원의 원보사(袁保社)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향4
"후수르 교수는 업무에 아주 열성적입니다. 우리들은 후수르 교수와 함께 수십년동안 일해 왔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이지만 날마다 제일 먼저 실험실에 도착하고 또 제일 마지막 사람으로 퇴근합니다. 토요일에도 실험실에서 보내고 일요일 오전도 출근, 한주일에 반날밖에 휴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연구팀을 아주 잘 이끌고 있습니다. "
지난 30년동안 후수르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자주적 지식재산권을 보유한 30여종의 민족어처리시스템과 응용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이런 성과들은 신강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 신강의 소수민족들은 모두 컴퓨터의 모어 프로그램으로 원고를 처리하고 사이트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후수르 교수는 기술기초가 박약한 환경에서 신천지를 개척했습니다. 최근 몇년간 후수르 교수는 중국의 대표로 미국, 유럽 등 지를 방문, 국제기준화기구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또한 국제 및 국가 기준 7개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 중에 "중국 고대 돌궐문 등 일부 고대문자의 국제번호기준"은 ISO 기구의 집행기준으로 되어 국내외에서 중대한 영향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주도한 중국기준은 궁극적으로 세계의 인정을 받아 국제 관련 영역에서 중국의 권위성과 발언권을 수립했습니다.
지금 국가중대특별대상의 지원밑에 후수르 교수의 연구팀이 개발한 아랍문, 카자흐문 등 컴퓨터서버, 화면과 휴대폰시스템은 카자흐스탄, 터키, 이집트 등 국가로 판매되었습니다.
최근 몇년간 후수르 교수는 또한 국가 863계획 지능기 특정연구 7개를 주도적으로 완성했으며 20여명의 과학기술 핵심인재와 100여명의 연구생을 키워냈습니다. 그의 주도하에 신강대학은 60여명 규모의 다민족 정보기술연구개발팀을 구축했습니다.
지금까지 중국 위글족의 첫 원사인 후수르.이스라므 교수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이상으로 이 시간 [사회생활] 방송을 전부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애청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 김금철이였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