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편집선생님, 초라한 저의 글이 미국행을 꿈꾸는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가 하여 적어보았습니다.
미국에 온지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지금 고향 연변에서는 비오는 날이면 가까운 친구들과 모여앉아 오손도손 재미있는 이야기 꽃을 피우겠지요.
여기 로스앤젤레스는 4일째 연속 찜통더위로 숨이 헉헉 막혔는데 오늘은 좀 서늘해요. 가끔 2층 침실에서 잠자기전 창문너머로 보이는 키높은 야자수를 보면서 어릴 때 그림책에 있는 야자수를 보면서 신기해 했던 추억을 떠올리다 잠들어 버리곤 하지요.
얼마 전부터 가끔 고향 생각이 나면 연변일보나 연변 방송을 인터넷으로 보면서 추억을 되살려보곤 하다가 오늘은 갑자기 한마디 하고 싶어 저의 마음을 이 글에 담아볼가 합니다.
제목을 '새로운 꿈의 시작'이라고 하는게 더 좋을 것 같네요.
10년 전 2002년 5월 3천달러에 트렁크 하나만 챙긴채 훈춘-북경에서 로스안젤스까지 희망과 꿈을 싣고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한지 3일째 되던 날 지인들의 도움으로 한국인 미용실에 취직했습니다.
직장을 찾았으니 시작은 잘된 셈, 하숙집을 찾았습니다. 한달에 400달러씩 주기로 하고 큰집 방한칸을 얻었습니다.
미용실 도우미라서 월급은 1100달러였는데 방값과 버스표값 등을 빼면 600달러만 남았습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내가 왜 미국에 왔지 하면서 한없는 후회가 솟구쳤습니다.
혼자라는 말못할 설움때문에 텅빈 방안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미국 도착 4일째 되던 날은 저의 생일이었지만 누구도 축하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남편과 딸 생각에 텅빈 방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렇게 8일간 미용실에서 일하고 이건 아니다 싶어 바로 피부미용원에 새로 취직해 일을 시작하니 천국에 온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나의 상냥한 태도와 열심히 일한 대가로 수입은 하루하루 생각보다 빨리 불어나고...1년뒤 바로 나의 피부 미용실을 오픈했습니다. 정작 시작은 했는데 손님 한명도 없는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텅빈 손님 침대에 엎디여 기껏 울었습니다. 앞날이 걱정되고 무서웠다.
두달만 손님이 없으면 빈털털이가 되는것. 광고비와 렌트비 두달치만 가지고 시작한게 후회됐습니다. 조금 더 여유가 있을때 시작 할 걸하고.
다행히도 같은 빌딩안 미용실 원장님이 첫 손님이 되어주었고 제가 나가는교회의 장로사모가 10회권을 끊어주어 멋있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손님이 붇고 장사가 잘되여 3개월 뒤에 더 큰 가게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침일찍 깨여서 상담실 한쪽에 꽉찬 대형 벽거울을 보면서 '너는 할 수 있어' 하고 열번을 웨치고는 길건너 운동장에 가서 10바퀴씩 달리고 나면 하루가 멋있게 시작 되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루종일 열심히 손님들의 피부를 예쁘게 가꾸어드리고 그분들이 아주 만족스러워하면서 가게를 나설 때면 정말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때의 그 흥분과 희열은 10년이 흐른뒤의 오늘도 잊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니만큼 영어공포증을 해소할 생각으로 우리교회 집사님이 경영하는 종합대학원에 영어과를 신청했습니다.
학장님은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내가 하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아온터라 원하는대로 언제까지라도 공짜로 공부하라는 것이였습니다.
내겐 천사같은 분이셨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손님들 피부를 다루고 저녁에는 캘리포니아종합대학에서 영어공부를 하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계속 열심히 뛰었습니다.
여기 로스안젤스 한인타운에서 이름은 <에스더 스킨케어>라걸고 '중국정통경락'- 중국식의 피부미용을 하는사람은 나뿐이고 효과가 좋고 분위기나 상냥함이 널리 알려지면서 장사는 하루하루 좋아졌습니다.
나는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고맙고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그후부터 미국에서의 생활은 더 자신있고 남보다 더잘할 수 있다는 강한 집념 때문에 하는 일마다 거의 잘되었습니다.
하지만 3년반 뒤 한인타운의 한국인 변호사 부부의 사기에 걸려 나의 뼈돈을 다 날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다른 장사마저도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운데 딸의 미국입국비자 통지서가 날아와 딸애를 데리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요?! 딸애가 상상했던 아름다운 미국 저택은 말고 단칸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나랑 외할머니랑 같이 살았으니
공주같이 예쁘게 중국에서 커온 나의 딸에게는 큰 실망이었습니다.
나는 딸애를 여기저기 데리고 운전하면서 갖가지 아는 만큼의 미국의 좋은점들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교회한국분들도 파티나 좋은 모임들을 많이 만들어 딸애가 미국을 좋아하도록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덕분에 딸애는 한달만에 정이들었고 더는 중국에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주머니는 텅 비여 있었습니다. 차도 친정엄마로부터 꾼돈으로 샀고 인생에 빚을 모르고 살던 나로선 기가 막혔습니다.
그렇다고 금방 미국에 온 딸앞에서 궁상을 떨수도 없고… 저는 넘어선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기로 작심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3년반을 울면서 기다렸던 남편에게 이민국으로부터 영주권 허가가 난 비자가 허락되여 드디여 남편이 오게 됐습니다.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이였지만 티를 안내고 남편과 딸과 함께 여기저기 신나는 여행도 하고 여러 나라 음식도 즐기면서 나딴엔 잘하는 줄 알았는데
도착한지 두주밖에 안된 남편이 중국에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떤 고생을 하면서 기다렸던 남편인데?! 기가 막혔습니다.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답니다.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내 가 아무리 잘해 줘도 남편은 맘에 안 차하는 눈치였습니다. 작은 단간방에 딸과 남편 친정엄마까지 네사람이 있었으니 남편이 중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지금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가 중국에 돌아간 후 6개월뒤 이혼하자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잘되길 바란다는 말한마디로 전화를 끊는 순간 나의 18년의 사랑이 이렇게 끝을 본다는게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껴줬던 세상에 둘도없이 훌륭한 남편이었습니다.
3년 반동안 남편에게 따뜻한 밥한끼 해주지 못한 죄때문에 두말없이 이혼하자고 말을 맺고는 전화를 끊고 한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했지만 남편도 이해가 됐습니다. 원래 한없이 착한 남편이 중요한 공직에 있기도 하지만 새롭게 시작한다는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혼 뒤 두달동안 하염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서럽고 원통했습니다. 딸애의 위로로 제정신이 펄쩍 들었습니다. <엄마의 지혜로는 좋은 사람 만나 크게 성공할 수 있어요.>
결국 딸애의 믿음이 나의 상처가 빨리 아무는 보약이 되였습니다.
그뒤로 미국주류사회 사람들과 사귀면서 지름길을 찾을수 있게 되였습니다...
다행히도 웃기좋아하고 상냥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덕분에 미국사람들은 나를 너무나도 좋아했습니다!
교회의 한국분들도 미국친구들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저 내가 깔깔대고 웃는게 좋아서 내얼굴에서 웃음이 넘치게하기 위하여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작정 도와주고 밀어준 덕분에 하루하루 사는게 신나기만 했습니다. 물론 타향이다보니 어렵고 억울할때도 많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미국온지가 어제같은데 벌써 10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3년 전에 나의 딸 쌜리는 캘리포니아의 유명 대학에 입학했는데 100%장학금을 받아가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명류대학에 다니고 있는 딸애를 보며 미국친구들마저 부럽다고 혀를 내두릅니다.
2009년 8월 미국온지 7년만에 꿈에도 바라던 2층구조로된 655평짜리 집을 로스안젤스의 부유층동네 한복판에 샀는데 여름방학간에 뉴욕에 여행갔다온 딸애가 앞으로 자기가 대학교간다음 큰집에 혼자 외로워할가 엄마가 걱정된다면서 귀엽고 예쁜 강아지 한마리 사라는 충고가 대견스러웠습니다.
딸 쌜리가 그뒤로 예쁜 고양이 두마리를 갖다주었습니다. 딸애가 대학교를 간다음의 빈구석은 뭐라 비유할 수없는 고독과 텅빈 형용할 수 없는 아픈 마음뿐이였습니다. 외로움 때문에 죽고싶을 때도 가끔 있었습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두 고양이들이 나의 애기가되여 그들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면서 외로움을 이겨내였습니다.
사람들이 왜 동물과 정이 들어 울고불고 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올해6월3일, 저는 꼭 마음에 맞는 상대를 만나 1년 5개월간의 데이트를 거친 후 캐나다와 미국 국적을 지닌 심리학박사(심리의사)알렉스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동안 미국에와서 뒤도 돌아볼 사이없이 열심히 살아온 내가 요즘들어 조금 여유가 있으니 고향 생각에 가끔 혼자 파묻히기도 합니다....
올림픽을 통해 본 중국은 세계를 흔들고도 남았습니다. 날마다 날아오는 중국의 새로운 발전 소식은 나의 마음을 설레이게 합니다.
어제 미국뉴스에서 들었는데 10년 사이 중국 국민수준이 꼭 4배로 더 좋아졌다고 합니다. 바로 내가 미국행을 선택한 뒤의 10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내가 태여나고 36년간 자란 그땅이 더더욱 번영창성하기만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 가...
아무튼 중국의 급부상은 나에게 중국에서 태여난 조선족이라는데 더욱 긍지와 자랑을 느끼게 해주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9월엔 남편 알렉스와 함께 중국으로 허니문 여행을 15일간 떠난다. 아직도 한달 남았는데 괜히 고향 생각에 마음은 설레이면서 10년 전에 내가 살았던 고향으로 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살고있는 미국 로스안젤스는 나의 인생 두번째 꿈이 어려있는 천사의 도시요,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여전히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로스안젤스를 사랑한다. 나에게 넘어질 때마다 기회를 주고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오늘까지 꾸밈없는 힘과 용기를 주어 중국 연변의 한 가냘펐던 여인이 우뚝설 수 있게 해준 천사의 도시-로스안젤스를 나는 사랑합니다.
나를 위해 진심어린 기도와 사랑과 도움을 주신 분들이 함께 하기에 나는 내일도 모레도 연변에서 태어난 조선족이라는 긍지감을 한몸에 가득 안고 여기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희망의 새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며 또 새로운 내일을 맞이 할 것입니다..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7월 23일 2012년
김미화
녜, 10년의 세월이 묻어 있는 김미화씨의 드라마틱한 인생사 이야기, 참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부여해 주고 또 김미화씨의 말씀처럼 미국행을 꿈꾸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는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앞으로 김미화씨에게 더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올해 6월에 결혼하셨다고 하셨는데요, 늦게 나마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9월에 있게 될 허니문여행 즐거우시길 미리 기원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남: 이외에도 연변의 김경선, 주춘희 청취자, 장춘의 방채금 청취자 등 많은 분들이 "중한수교 20주년 기념 지식경연" 답안지를 보내주셨구요, 구태시 신립촌의 마경옥, 윤영학, 김분선 청취자, 장춘의 정금자, 김석찬, 정순애, 신금자, 김춘자,박옥경,리명숙,김경재,주순자, 라석규, 최정자,김정숙, 안순복, 큰리명숙, 최윤의, 황정숙, 황봉욱, 김금옥, 옥부자, 김윤중, 안종화, 강주암, 고철종, 유선옥, 이희림, 천채붕, 이규룡, 박신자, 심상건, 김미자, 태순자, 금단, 김혜숙 청취자 등 많은 분들이 전화, 메일 또는 편지로 8월의 퀴즈의 답안을 보내주셨구요, 시간상 관계로 일일이 소개해 드리지 못한 점 양해구하겠습니다.
여: 지금까지 편지 사연 보내 드렸습니다. 그럼 여기서 노래 한곡 듣고 올께요, 저희는 잠시 후 청취자 핫라인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