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0 19:11:02 | cri |
여: 가슴으로 불러보는 아버지
부드러운 봄바람과 함께 청명절이 다가옵니다. 언제나 청명과 추석이 되면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계시는 산소에 가서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올린 뒤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 속으로 "아버지도 와서 함께 드세요"라고 외우군 합니다. 아버지는 1945년 길림성 통화 류하현에서 동북항일련군에 입대해 194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47년 이홍광지대 166사 피복관리장으로 있으면서 가족을 통화로 데려왔습니다. 그뒤 아버지는 심양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한 후 항미원조 전쟁에 나갔고 저는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모두들 나를 유복자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니였습니ㅏㄷ.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아직 생존이셨고 전투장에서 싸우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영영 아버지를 보지 못한채 잃고 말았습니다. 내가 네살 때입니다. 우리 집에 아저씨 한분이 오셨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분을 보자 대성통곡하셨습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그냥 할머니와 어머니가 너무 슬피 우시니까 나도 따라 울었습니다. 내가 두세살때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머릿속에 기억나는 것이 어머니가 저를 보고 "아버지 언제오나 머리 한번 긁어봐라"고 말씀하시군 하셨습니다. 난 처음엔 어떻게 긁었는지는 통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뒤로는 언제나 앞이마를 긁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네 이모랑 오시면 나에게 뒤통수를 긁으면 아버지가 오래 있다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린다면서 매일 "아버지 언제오나 머리 긁어보라"고 하면 나는 앞이마를 긁군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27세에 두딸을 거느린 청상과부가 됐습니다.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하셨습니다. 그때 군렬속 가족으로 보조금이 나왔지만 생활유지에는 턱 부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삯빨래질도 하셨고 조선중학교식당에서 식모로 일하셨고 묘포에 가서 벼모를 키우는 일 지어 양식창고에 가서 양식마대를 나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군속피복점에 들어가 재봉공으로 일하면서 고정된 일자리를 얻게 됐습니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떄 오후에 좀 일찍 방과하면 어머니가 일하는 공장에 가보군 했습니다. 어머니는 애들이 공장에 오면 공장장이 나무람한다며 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윙윙 돌아가는 전기재봉침에 전등을 켜고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신기해 자꾸 그곳으로 달려가군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생산지표를 그라프로 그려놓았는데 항상 어머니 이름위의 줄이 제일 높았습니다. 어머니는 생산모범이었습니다. 주말도 휴가도 별로 없었고 퇴근 후 밤에도 늘 일을 더하셨습니다. 언제나 나는 할머니가 지어준 저녁밥을 먹고 한잠 자고 깨어나 보면 어머니는 그때서야 돌아오셔서 저녁식사를 하셨습니다. 밤중에 소나기가 내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낡은 지붕이 새여 방구들에 비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우리 옆집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으나 그집에는 아저씨가 비옷을 걸쳐입고 지붕에 올라가 보수공사를 펼쳤지만 어머니는 비옷도 없이 맨 옷 바람으로 큰 소나기를 맞으시면서 지붕에 올라가 손보았습니다.
이 가정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의 두 어깨는 참으로 무거웠습니다. 주변에서는 우리의 상황이 너무 딱해 가끔씩 어머니께 재가하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모두 거절하자 후에는 어느 누구도 이 일을 더는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나는 열사의 자녀들에게 의붓아버지 밥을 먹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 옆집에 사는 집에는 아이들이 넷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출장갔다 돌아오면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아버지, 아버지"하며 환성을 올리군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물이 넘도록 한번도 "아버지"라는 말을 입밖에 내보지 못했습니다. 동학들과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오갈 때면 "아버지"라는 세 글자를 입에 담기 두려워서 그 말을 아예 삼켜 버리군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세글자는 나에게 어마어마한 존재였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첫 학부모회의가 열렸을 때 반주임선생님이 어머니에게 내가 장난끼가 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부모 회의가 끝나자 어머니는 나를 앉혀 놓고 "넌 너의 아버지가 혁명을 위해 몸바쳤고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 무엇때문인지 알겠지?"단 한마디 말씀이었지만 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앞으로 저의 행동을 보세요"라고 한마디로 대답했습니다. 물론 후에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실제행동에 옮겼습니다. 언니가 사범학교에 다닐 때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언니는 나에게 "우리의 아버지는 의로운 일에 몸 바쳤으니 우리는 꼭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편지로 나를 고무격려했습니다.
언니의 그 말씀은 그때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계속 아버지를 따라배워 의로운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자신을 고무격려하고 있습니다.
올해 청명절에는 고향에 돌아가 제사상을 차려드리지 못하지만 할머니 어머니가 계시는 통화 206병원 뒷산에 떨기떨기 피어나는 진달래 꽃속에서 저 세상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 함께 만나셔서 좋은 시간 가지시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빕니다.
장춘시 경제기술개발구 조선족노인협회
이순희
2014.3.29
***
눈물겨운 편지사연입니다. 어머니의 꿋꿋한 일생, 어려움 속에서도 올바르고 강하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꿋꿋한 모습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참 감격적입니다. 이러한 강한 의지와 인내는 현 시대 젊은 부부, 젊은 부모들이 본받아야 할 바라고 생각합니다. 이순희 청취자 덕분에 좋은 사연 공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China Radio International.CRI. All Rights Reserved.
16A Shijingshan Road, Beijing, Chin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