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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3일 방송듣기
2015-07-03 18:20:36 cri

[편지왔어요]

남:편지왔어요, 이 코너에서는 여러분이보내주신따끈따끈한 사연들을 전해드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먼저 연변의 박철원 청취자가 보내주신 사연부터 만나보겠습니다.

여: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훈춘분회설립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훈춘분회가 6월27일 정식 설립됐습니다.

훈춘시당위 선전부, 시당위 로간부국, 시 "관공위", 시 방송국 등 부문의 관심과 지지로 훈춘지역의 조선어방송애청자들에게 모임의 장을 꾸려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훈춘분회를 설립했습니다.

시 로간부국회의실에서 소집된 이날 설립의식에는 시 관공위, 시방송국,,"두만강신문사"조선문편집부와 시 텔레비죤방송국 등 관련부문책임자들이 참가하여 축사를 올렸습니다.

제1진으로 22명 회원이 참가한 이 분회에서는 원 시 규률검사위원회서기였던 정창선 노인을 회장으로, 이송규 시 통련협회 회장을 부회장으로 발탁하고 시 "관공위"주임 박병룡을 고문으로 초빙했습니다.

연변주 애청자협회에서 협회의 성질, 직권, 의무들을 소개한후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행사들에 소개를 주었다. 올해로 9년인 이 협회에서는 "애심"과 "애청"을 주제로 애청자대오건설을 틀어쥐고 방송을 열심히 듣는 한편 사회공익봉사에도 적극 참가하면서 많은 감동의 사연을 쌓아오며 사랑의 전도사로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훈춘 분회 회원들가운데는 글쓰기 열성자들이 많고 애심기여를 즐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랑떡집을 경영하는 김성찬 청취자는 훈춘 지역의 소문난 애심가로서 짬짬히 방송도 열심히 들으며 우리민족 미풍량속을 잘 이어나가는데 크게 기여하련다며 분회의 설립을 대희사라고 말했습니다.

라지오세대를 맟추어 놓고 우리말방송을 열심히 듣는다는 유재익씨는 훈춘지역에도 애청자가 수천명 조직될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진달래예술단에서 활약하는 채규억선생도 방송이없이는 못산다며 가는 곳마다 홍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7년동안이나 혼자서 훈춘시의 유일한 대표로 애청자협회활동에 참가하려 연길로 다녀오던 리철호씨는 오늘부터 "본가집"을 찾게 되였다며 수년간 애청자협회회원이된 소감도 털어 놓았습니다.

훈춘분회 고문으로 위촉받은 박병룡 주임은 원 시정부시장 등 줄곳 령도자사업을 하면서 오늘 처음 조선글로 쓰인 회의 프랑카드를 보며 조선말로 발언하는 그 감수가 특별하다며 우리 조선족로인들이 이토록 풍요롭게 노후를 보내는 일이 참 보기좋다며 앞으로 방송 발전을 위해, 청취자들에게 더 많은 편리와 활무대를 만들어 주겠다고 힘을 주었습니다.

노간부대학 성악반에 다닌다는 리송규, 전순복등이들은 기쁨에 겨워노래도 선물하였다.

박철원

***

이번 주 청취자의 벗 프로가 첫 방송되는 7월 2일은 중국국제방송 조선어방송 개시 65주년이 되는 기념일입니다. 이러한 뜻깊은 날에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훈춘분회가 정식 설립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그 기쁨과 감동이 배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연변애청자협회 박철원 회장님을 비롯한 협회 확장과 질 제고를 위해 항상 노심초사하시고 또 생각을 현실로 바꾸어 실천해 나가는 청취자 여러분에게 이 기회를 빌어 재삼 고맙다는 인사드립니다.

청취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우리 방송이 올해로 개시 65주년을 맞이하게 됐는데요, 우리의 인생과 달리 방송만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해를 거듭할수록, 또 경험이 쌓일 수록 더욱 내실 있고 활력 있는 멀티미디어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뉴미디어가 등장한다고 해도 청취자들과의 호흡만은 빠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항상 열심히 우리 방송을 지지해주시고 있는 애청자분들께 고마운 마음입니다. 좋은 소식 보내주신 박철원 청취자 고맙습니다.

그리고 7월 1일은 건당절 즉 중국공산당 창립 기념일인데요, 올핼 94주년이 되죠. 이와 관련해서도 중국 각지에서 많은 기념 행사들이 이루어졌는데요, 우선 연변의 박철원 청취자가 보내주신 소식 만나보겠습니다.

"7.1"맞이 당과

중국공상은행연변분행 리퇴직간부당지부에서는 "7.1"을 맞으며 당과교실을 혁명전적지 현장으로옮겼다.

6월26일 이 당지부40여명 공산당원들은 유서깊은 룡정시에가 <<연변제1당지부>>유적지를 찾아 그곳에 모셔진 동북항일련군장령들의 조각상앞에서 입당선서문을 되새겼다.

이어 그들은 위 일본령사관에 설치된 지하감옥을 돌아보며 중국인민을 잔혹하게 심문하며 학살한 일제침략자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성토하면서 모두들 력사를 잊지말고 중화를 진흥시키자고 다졌다.

이어 일행은 명동촌에가 애국시인윤동주생가와 시비를 돌아보면서 항일투사의 견의한 혁명정신과한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살아온 그의생애에 흠모의 경의를 올렸다.

백발이된 그들 모두가 사업터에선 물러선 몸이지만 선렬들의 혁명정신을 본받아 여열을 당과 인민에게 다 바치리라 다졌다.

또 건당 기념일 맞으며 6월26일 연길시 건공가두 연춘지역사회에서는 연변로인대학과 손잡고 문화광장에서 "7.1"맞이 특별무대를 마련했다.

이 지역사회에 거주하고있는 항공승무원학교와연변주 로인대학, 소방지대들에서도 문예절목들을 내여놓고 지역사회 민속무용대에서 새롭게 창작한 프로들을 선보였다. 공연 사이에 당에 관한 지식경연도 벌여 대중들이 용약 참여하면서 로인도 어린이도 정답내놓기에 열성을 보였습니다.

프로들마다 위대한 중국공산당과 조국을 노래하고 공산당원의 선두적역활을 찬미했으며 조화로운 사회를 꾸려가며 중화의 꿈을 이루어가는 참신한 정신풍모를 과시했습니다.

이외 또 6월25일 연길시진학가두에서는 <<중국인민항전승리 70돐맞이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중국조선족 항일가요합창단의 <<송화강에서>>와 <<대도 행진곡>>으로 서막을 연 이번 음악회는 3부악장으로 포화의 년대, 새중국 건설, 미래를 꿈꾸며로 대중들이 친숙한 노래들로 이어졌습니다.

***

다양한 기념 행사 소식 전해주신 박철원 청취자 고맙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장춘으로 떠나 보겠습니다. 윤영학 청취자가 사연 보내주셨습니다.

소화영웅과 그의 어머니가 엮은 미담

 ̄ 소화영웅 허학진 렬사순국20주년을 기념하여

돌아오는 6월 27일은 허학진 렬사순국2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09년 10월 나는 장춘시 조선족관공위남관분회와 경제개발구 분회의 위탁을 받고 영웅렬사의 고향을 찾아 그의 어머니 량순자 노인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그때 이 로인님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와 그후 렬사 생전소속부대 지전원들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하도 감동적이여서 이 글을 쓰게 되였다.

영웅의 고향은 중조변경구역인 두만강변에 위치한 룡정시 삼합진이다. 아담하게 새로 지은 농촌 기와집에서 큰 아들네와 같이 단란하게 살고 계시는 영웅의 어머니는 호리 호리한 키 갸름한 얼굴에 인자한 웃음, 얼핏 보아도 소박하고 시원시원한 70대를 넘긴 농촌 노인임이 틀림 없었습니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으면서 가슴 아픈 추억을 더듬으며 영웅의 동년시절부터 시작해 부대에서 희생될 때까지 전후 과정을 차근 차근 들려주었다.

학진이는 1972년 룡정시 삼합진(부유향)조동촌에서 막둥이로 태여났다. 걸음마를 타기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뇌염에 걸려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두 자식을 키울 때보다 학진이에게 더 정이 쏠렸다고 합니다. 학진이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매우 극진했습니다. 찬바람 울부짓는 겨울이면 청년 활동실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가마목을 짚어보며 어머니 이부자리를 언제나 따스한 가마목에 펴드렸습니다. 그리고 커서는 어머니가 힘든 일을 할세라 돼지죽도 도맡아 주군하였으며 군대에 나간 후에도 편지마다 어머니께서 힘든 일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워낙 성근하고 활달한 성격이여서 집에서뿐만 아니라 밖에 나가서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1989년에 룡정시 조양천 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하루 소수레를 몰고 일밭으로 나가다가 술에 취한 로인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는 무심히 지나지 않고 수레에 그 노인을 싣고 집까지 모셔다 드려 동네방네에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는 다 커서도 노상 어머니를 <<엄마 엄마>> 하고 친절히 부르면서 어머니께는 좋은일 궂은일 숨길줄 몰랐다. 평시에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주 <<엄마 나는 살아도 빛나게 살고 죽어도 빛나게 죽겠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는 학진이가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인생관의 솔직하고 소박한 고백이 였겄만 그 당시 어머니는 그말의 함의를 미처 이해 못하고 무심히 귀밖으로 흘러보냈습니다. 아들이 희생된 후에야 비로소 그의 가슴속에 숨은 그 참뜻을 이해하게 되였다고합니다.

1993년도 군대모집이 있게되자 학진이는 선참으로 등록했습니다. 그의 본래의 소망은 탱크를 몰고 적의 보루를 향해 비호같이 돌진하는 야전부대였는데 생각밖으로 장춘시 소방지대 소방전사가 되였다. 그랬지만 그는 마음이 가라앉히고 무엇을 하면 무엇을 사랑하는 뢰봉 정신으로 소방사업을 열애하였으며 높은 책임감으로 소방훈련에 열중했습니다. 부대에 와서도 여전히 남돕기를 즐겼으며 특히 반장으로 승급한 다음부터 반내 동무들을 더더욱 관심했습니다. 그는 입대한지 불과 1년밖에 안되는 짧은 사이에 3차나 표창받았고 영예롭게 3등 공 1차에 우수전사로 선정됐습니다.

1995년 봄 그는 어엿한 중국인민경찰전사로 집에 휴가를 왔댔다. 부대로 떠나기 몇일전 그는 밤에 어머니곁에 다가앉아 소방부대생활을 차근 차근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불끄기 전투는 전선에서 적과 싸우는것과 마찬가지로 필요시에는 생명도 서슴없이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며 농사일에 거치러진 어머니 손등을 정겹게 쓸면서 재삼 당부했습니다. <<엄마 전투에서 어찌 상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소 어떤 유가족들은 부대에 와서 무리한 태도로 과분한 요구까지 제출해 부대지도자들을 난감하게 하는데 나는 그게 참 질색이오. 엄마 만약 내가 죽더라도 엄마는 절때 그러지 마오 이러면 내 얼굴에 똥칠하는거요.>>

그는 평시 소방근무에서 소화전투의 간고성과 위험성을 친히 체험한데서 인민의 생명재산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자기 목슴마저 서슴없이 다 바칠 만단의 사상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995년 6월 27일 새벽 장춘버스공사 남역 대합실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소방지대에서는 전투의 태세로 소방차 33대, 장병180명을 출동시켰습니다. 그날 당직이고 1호차, 1호전투원이며 2반 반장인 허학진이는 추호의 주저도없이 오로지 인민의 생명재산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전투에 뛰여들었습니다. 세 전우와 함께 재빨리 사다리를 잡아타고 세차게 타오르는 지붕우에 올라가 지붕에 구멍을 뚫고 불타는 천장에 잽싸게 물총을 휘둘렀습니다. 그렇게 충천하던 화세는 차츰 기염이 꺾이기 시작했지만 불타는 지붕에서 뿌지직, 뿌지직하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습니다. 이는 지붕이 수시로 무너져 내려앉을 위험이 있음을 알려주는 긴급신호임을 소방전사 허학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것만 이 화재 중점 부위의 기염을 빨리 꺾는 것이 그 무었보다 긴요한 것이였기에 그는 목숨으로 진지를 사수하는 전사마냥 추호의 동요도 없이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물총을 휘두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때 별안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1120평방메터의 지붕 전체가 무너져 내려않는바람에 허학진이는 다른 한 전사와 함께 불바다 속에 떨어졌다. 전사들이 그를 구하려고 물총을 쏘았으나 거리가 멀어 효과를 보지 못하고 계속 무너져 내리는 천장에 깔려 학진이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해 허학진은 23세였습니다.

비보를 받고 가족의 부축임을 받으며 어머니는 부대에 도착하였다. 그렇게도 애지중지 키운 키 1미터80센치나 되는 훤칠한 아들이 경찰복을 정연하게 차려입고 조용히 눈을 감은채 누워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목이 터지게 아들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렇게 효성스럽던 아들은 어머니의 애타는 불음에 영영 대답이 없었습니다. 생전에 그렇게도 <<엄마 엄마>>하며 다정다감하게 굴던 아들이 희생되였다는 꿈같은 현실에 어머니는 그만 정신을 잃었습니다. .....

부대병원의 지성어린 치료에 의식이 회복되자 가장 먼저 어머니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바로 몇달전 아들이 휴가차로 집으로 왔을 때 간곡하게 부탁했던 그 의미 심장한 말이었습니다. 그렇다 아들은 생전의 위대한 리상을 목슴으로 실현하지 않았는가 ! 빛나게 살고 영광스럽게 희생( 生的伟大 死的光荣)되었으니 그 진지한 부탁을 생각해서라도 견강한 조선족 여성으로 또 학진의 어머니답게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단속하며 힘내어 침대에서 일어났습다. 부대 지도자가 친히 찾아와 사후 처리에 무슨 요구가 있는가고 친절하게 물었을 때 어머니는 <<나는 아직도 내힘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아무런 요구도 없습니다.>>라고 하며 사후처리문제로 너무 난감해 하지 말라고 도리어 부대지도자를 위안하였다. 그 책임자는 이 상상외의 대답에 그만 목이 꺽 메어 어머니 두손을 부여잡고 한참 고개를 숙이고있다가 이윽고 또 다른 문제를 물었다. <<골회암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 물음에도 어머니는 먼저 부대와 전우들을 생각했다. <<고향땅 내 곁으로 가져갔으면 좋겠지만 이곳에 남겨두는것이 더 좋을것 같습니다. 생전에 그렇게도 이 소방부대에 충성했으니 죽은 령혼이라도 부대와 전우들을 도울 것 같아서 입니다.>>어머니 대답이 떨어지자 마자 지도자를 배동했던 아들의 생전 두 전우가 <어머니 !>>(妈妈!)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를 와락 포옹했습니다. 모두다 너무나 감개무량하여 변강땅 연변에서 온 이 조선족 어머니를 경모의 정으로 오래오래 우러러 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아들의 희생에 대해 아주 대견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항미원조 전선에서 희생된 렬사들은 그 가족들이 시체조차 찾지 못했는데 그들에 비하면 그래도 자신은 괜찮은 편이며 아들이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게 희생되였으니 보지못해 그리울뿐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또 지방정부의 배려와 장춘시 소방지대의 따뜻한 관심으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몸에 병은 있어도 아들 며누리의 극진한 효성에 떠받들려 만년을 행복하게 지낸다고 하였다. 이때 옆에 앉아있던 며느리가 한마디 보탰다. "시어머니의 옳바른 처사로 하여 지난해 우리 가정은 삼합진 5호가정으로 선정되였습니다. " 나는 영웅을 낳은 이 어머니에 대한 참단을 금지 못하면서 여러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 로인님이 하루속히 완쾌해 건강 장수하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2011년에 로인님이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가석하게도 끝내 별세했다는 비보를 받았습니다.

비록 영웅과 그의 어머니는 우리곁을 영원히 떠나갔지만 그들의 고상한 애국주의정신과 시대적 정신은 아름다운 중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고있는 우리들을 힘차게 고무격려할 것입다.

특히 우리를 기쁘게 하는것은 룡정시정부와 장춘시 소방지대의 중시와 사회 각계의 공동한 노력으로 금년 8월에 영웅의 고향 룡정시 혁명렬사릉원에서 소화영웅 허학진 렬사기념비 제막식이 있게 된다는 희소식입니다. 오늘 영웅과 그의 어머니는 구천에서 정두고 떠나간 고향과 장춘의 천지개벽의 대 변화를 감개무량하게 굽어보며 우리들이 어젯날보다 더 아름다운 미담을 계속 엮어가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윤 영 학

2015,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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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눈물 없이는 못보는 감동적인 사연입니다. 사연 보내주신 윤영학 청취자 고맙구요, 소화영웅 모자간이 지금도 그 어느 곳에서 다정하게 부모자식간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금년 8월에 영웅의 고향 룡정시 혁명렬사릉원에서 소화영웅 허학진 렬사기념비 제막식이 있게 된다고 전해주셨는데요, 꼭 원만히 잘 이루어져서 보다 많은 분들에게 홍보가 되고 귀감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도 보다 많은 사연 기대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편지 사연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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