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9 09:26:58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28] 기현: 옛 금융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기현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스물 여덟 번째는 금융의 옛 도시 기현(祁縣)이다. 기현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교가대원(喬家大院)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드라마 <교가대원>이 방영되면서 기현고성은 하루 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고성의 많은 옛 거리와 골목, 옛 사원, 옛 가게, 옛 민가 등이 이 곳이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 번성일로를 달렸다는 증거로 남아 기현이 산서(山西)의 눈부신 보석임을 증명한다.

산서의 중부에 위치한 기현은 뒤로는 태악산(太岳山)을 업고 서쪽으로 분하(汾河) 강과 이웃하며 여러 갈래의 도로와 철도가 교차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토지가 비옥하며 물산이 풍부한 기현은 예로부터 ‘황금의 기현’이라 불렸다.

(사진설명: 기현고성의 건물)

1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기현고성은 북위(北魏) 때 신축되었다. 엄밀한 배치와 정교한 건축기법을 자랑하는 고성은 성벽의 동서 길이가 850m, 남북 너비가 700m, 둘레가 3km에 달하며 성(城池)의 모양이 고대 관리들이 쓰던 사모와 비슷해서 사모성(紗帽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과거 기현고성은 벽돌로 성벽을 쌓고 성벽의 밖에 해자를 팠으며 성의 사면에 성문을 두고 성문의 상단에 편액을 걸어 웅장함을 자랑했다. 전쟁과 세월의 영향으로 오늘날 성벽은 사라졌지만 성안의 건물은 여전히 보존되어 세인의 주목을 끈다.

옛 거리와 옛 사원, 옛 가게, 옛 민가들로 구성된 고성은 구도가 합리하고 질서정연하게 혼연일체를 이룬다. 건축전문가들이 ‘거리 네 갈래, 골목 스물 여덟 갈래, 마당 마흔 여덟’이라고 개괄하는 기현고성은 고대 중국 현성(縣城)의 배치와 거리계획, 민가건물, 상가 배치를 연구하는 실물적 자료이자 명나라와 청나라 때 상업의 번창함을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기현고성의 거리와 가게)

기현은 산서 상인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었다. 역사적으로 산서인들은 장사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며 기현상방(祁縣商邦)은 산서 상인의 대표이다. 상방은 송(宋)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명나라 때 규모를 형성했으며 청나라 때 번창일로를 달렸다.

기현상방의 상호는 중국 전역에 분포되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러시아 시베리아, 모스크바, 조선, 일본, 남양 각지에도 진출했으며 일부 지역의 금융과 비단, 피혁, 엽차, 식량 등 무역을 독점하기도 했다.

청나라 때 수도권의 식량가게는 거의 전부가 기현상방이 차린 것이었으며 당시 기현성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상업금융의 도시였다. 그 중 기현의 민족 상업 자본가의 투자가 가장 많고 규모가 가장 크며 국가의 발전과 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업종은 오늘날의 금융업을 말하는 표호(票號)업이었다.

(사진설명: 거가대원의 일각)

금융업이 가장 번창하던 1800년대 중국 전역에 산재한 60여개의 표호 중 기현의 표호가 21개에 달해 기현은 중국의 금융업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현에서 가장 유명한 사업가로는 거가(渠家)과 교가(喬家) 두 가문을 꼽을 수 있다. 거씨 가문은 원래 상당(上黨)의 장자현(長子縣)에 살았는데 명나라 초반에 거제(渠濟)가 생활고를 피해 충의(忠義), 충신(忠信) 두 아들을 데리고 당상과 기현 사이를 오가며 특산물 장사를 시작했다.

다소 부를 축적한 거제는 1369년에 기현으로 이주했으며 그로부터 몇 세대에 걸친 거씨 가문 자손들이 어려운 창업을 통해 제9대에 이르러 노점상에서 벗어나 기현에 자신의 상호(商號)를 두게 되었다. 청나라 때에 이르러 거씨 가문은 최고의 번성을 누려 상호가 중국 전역의 여러 대도시와 부두로 퍼졌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교가대원)

교씨 가문은 처음에 몽골 및 러시아와의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후에 교씨 가문의 장사규모가 끊임 없이 커지면서 복성공(復盛公)을 중심으로 하는 19개의 상호가 있었고 종업원은 500명에 가까웠다. ‘복성공’이 내몽골 포두(包頭)의 경제기반 마련에서 한 몫을 해서 포두에서는 ‘복성공이 먼저이고 포두성이 그 후에 있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현재도 기현고성에는 교가대원(喬家大院)과 거가대원(渠家大院)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기현 고대 민가의 ‘쌍벽’을 이룬다. 기현성의 동대가(東大街)에 위치한 거가대원은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인 1700년대 중반에 조성을 시작했다.

기현의 갑부였던 거씨 가문은 기현성의 반에 가까운 부지를 매입해서 저택을 조성했다. 그로 인해 거가대원은 ‘거반성(渠半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밖에서 거가대원을 바라보면 마치 경계가 삼엄한 성을 방불케 하며 웅장하기 그지없다. 대원은 합리적인 배치로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의 구별을 분명하게 보여주며 건물마다 정교한 석각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교가대원의 일각)

기현에서 동북쪽으로 12km 거리에 위치한 교가대원은 청나라 때인 1755년에 조성을 시작해 그 후 수차 증축했다. 교가대원의 부지는 8,700㎡이고 저택의 주변에는 높이 10m가 넘는 벽돌 담장을 쌓았다.

교가대원의 건물배치는 한자로 ‘관(館)’자 모양을 나타낸다. 6개의 대원과 19개의 소원(小院)으로 구성된 교가대원의 건물의 숫자는 도합 313채에 달한다. 곧게 뻗은 통로 양쪽에 6개의 대원이 산재하여 엄밀한 구도와 정교한 설계, 웅장한 기세를 자랑한다.

(사진설명: 교가대원의 일각)

‘청나라 북방 민가건물의 보석’이라 불리는 교가대원은 영화 ‘홍등’의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교가대원의 건물에는 모두 채색 그림과 조각이 즐비한데 300여 점의 목각 중 중복된 내용이 하나도 없어 감탄을 자아낸다.

건축예술의 보고이자 민속학의 전당인 교가대원은 현재 기현 민속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현재 이 박물관에는 42개의 전시실이 있고 전시설에 전시된 2,000점이 넘는 문화재는 청나라 후반과 중화민국(中華民國) 초반 산서 중부의 민속풍물을 직관적으로 펼쳐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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