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천진)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일흔 세 번째는 근대 중국산업의 발원지 천진(天津)이다. 천진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수백 년의 유구한 역사를 떠올리고 무거운 역사의 짐으로 인해 발걸음을 늦춘 도시 천진에 다소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시대와 함께 하는 길에서 언제나 다소 늦은 발걸음으로 인해 천진은 오히려 고유의 독특한 매력을 가지게 되어 사람들은 천진의 영원한 친절함과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중국의 수도 북경(北京)과 이웃하고 바다에서 북경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천진은 1400년대 명(明)나라의 도읍을 남경(南京)으로부터 북경으로 천도한 명성조(明成祖)가 천자가 강을 건너는 나루터라는 의미로 천진이라는 지명을 하사받았다.
(사진설명: 모던한 천진의 일각)
1404년 명왕조가 천진에 수비군을 두면서 천진위(天津衛)라 불리기도 한 천진은 중국 북방에서 규모가 가장 큰 연해 개방도시이자 근대 중국산업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천진은 아주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천진에서는 많은 ‘중국의 최고’가 출현해 ‘근대 중국의 역사를 알려면 천진을 보라’는 말이 있다.
사합원(四合院)이 북경의 문화적 부호와 같다면 양옥은 천진문화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1840년대 아편전쟁 후 외세의 침입과 함께 외국인들이 천진에 밀려 들어 그들의 식민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오대도의 양옥들)
외국인들이 천진에 자리를 잡으면서 오늘의 오대도(五大道)에 양옥이 땅을 차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 풍과 프랑스 풍, 러시아 풍, 이태리 풍, 독일 풍을 비롯해 다양한 풍격의 양옥이 아름다운 외관과 정교한 장식으로 천진에 ‘만국건축박물관’이라는 미명을 안겨준다.
양옥마다 모두 수십 년 혹은 백 년 이상의 역사를 보유한다. 또 양옥의 주인 중에는 외국인들 외에 청(淸) 왕실의 구성원이나 신해혁명(辛亥革命) 후 북양(北洋) 정부 시기의 고위관리, 부자, 명인들도 있다.
예를 들어 자유도(自由道)에 위치한 옅은 잿빛의 양옥은 근대 중국의 학자인 양계초(梁啓超)가 머물던 장소이다. 또 마장도(馬場道)와 하북도(河北道)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양옥은 당시의 유명한 배우였던 마련량(馬連良)의 생가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천후궁)
그 밖에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묵었던 양옥과 청나라 내시의 공관, 북양군벌들의 거처 등도 모두 오대도의 대표적인 양옥들이다. 오대도의 양옥들에는 모두 이야기가 깃들어 있어 이 곳 양옥의 모든 방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천진은 또 중국 북방지역 마조(馬祖) 문화의 중심이다. 따라서 ‘남쪽에서는 미주(湄洲)의 마조묘(馬祖廟)가 제일이고 북쪽에서는 천진의 천후궁(天後宮)이 으뜸이다’라는 말이 있다.
천진의 마조묘인 천후궁을 중심으로 하는 고문화(古文化)거리는 현재 내외에 이름이 자자한 천진의 관광명소로 부상했다. 해하(海河)의 양쪽에 위치한 680m 길이의 고문화 거리에는 많은 청나라 때의 건물이 고색이 창연한 느낌을 안겨 주어 그 속에 서면 마치 세월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 듯 착각하게 된다.
(사진설명: 고문화 거리의 일각)
천진과 함께 수백 년의 번영을 이어온 이 거리에는 오늘날 천진 양류청(楊柳靑)의 세화와 니인장(泥人張)의 인형, 풍쟁위(風箏魏)의 연, 대표적인 중국 공예인 전지와 중국 매듭을 망라해 천진과 중국 전역의 민간 공예품들이 집중되어 사람들에게 짙은 고대 문화의 분위기를 안겨준다.
천진 구불리(狗不理) 만두는 거의 모든 중국인이 다 아는 천진의 특미이다. 천진인들은 ‘천진에 왔다가 구불리 만두를 맛 보지 않으면 천진을 보지 않은 것과 같다’고들 말한다.
구불리 만두는 하얀 만두피가 연하고 소는 기름지면서도 전혀 느끼하지 않아 그 맛이 일품이다. 구불리 만두의 역사는 백 년 전의 청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설명: 먹음직한 구불리 만두)
당시 14살난 고귀유(高貴有)가 무청현(武淸縣)의 양촌(楊村)에서 천진으로 와서 고기소 만두와 여러 가지 찜을 만드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 식당의 손님은 다수가 운하(運河) 부두의 뱃사공과 주변의 가게 주인들이었다.
고귀유는 이 식당에서 주로 만두를 만들었다. 고귀유의 부친은 마흔이 넘어서 얻은 아들이 강아지처럼 평안하게 살라는 마음으로 구자(狗子)라는 애명을 지어 주었다.
구자가 만든 만두는 맛이 좋아 아주 잘 팔렸고 손님들 속에서 인기를 누렸다. 3년 후 구자는 식당일을 그만 두고 그 동안 모아둔 자금으로 자신의 만두집을 차렸다.
(사진설명: 구불리 만두 본점 외관)
구자는 만두를 빚어 파느라 정신이 없는 관계로 늘 만두를 먹으러 온 손님들을 반길 여유가 없어 손님들과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그 바람에 손님들은 우스갯소리로 ‘구자가 만두를 팔면서 사람도 모른체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고귀유를 구자도 아닌 사람을 못 본체 하는 구자라는 의미로‘구불리’라고 불렀고 그가 만든 만두를 ‘구불리 만두’라 불렀으며 그로부터 그가 경영하는 만두집의 원래 명칭은 점점 잊게 되었다.
북양군벌인 원세개(袁世凱)가 ‘구불리’ 만두를 청 왕조의 서태후에서 진상했는데 맛을 본 서태후가 ‘그 어떤 진수성찬도 구불리 만두의 맛에 비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구불리 만두는 널리 명성을 떨쳤다.
(사진설명: 모던과 전통이 함께 하는 천진)
구불리 만두 외에도 천진에는 십팔가(十八街) 꽈배기와 튀김 떡, 만두 등 다양한 먹거리가 있다. 또 양류청의 세화와 니인장의 인형, 풍쟁위의 연, 객전류(刻砖劉)의 벽돌조각 등 민간예술은 내외에 명성이 자자하다.
1980년대에 천진은 식품거리와 여관거리, 복장거리 등 다양한 특색 거리를 조성해 천진의 풍부한 자원을 한 곳에 통합해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천진의 마천루들 사이를 걷다 보면 갑자기 눈앞에 아담한 양옥이 나타나고 현대적인 차량이 오가는 거리에서도 가끔 오래된 구식 자동차가 모습을 드러내서 사람들은 세월의 풍상고초를 겪은 도시에 있음을 실감하며 모던함과 전통이 이토록 한 도시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음에 감탄하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