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9 11:13:20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94] 구주: 사통팔달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구주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아흔 네 번째는 사통팔달의 도시 구주(衢州)이다. 한 도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려면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자세히 음미할만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

구주성의 명맥을 이루는 구주부성(衢州府城)과 공씨남송가묘(孔氏南宋家廟), 부산(府山), 방문가(坊門街), 천녕사(天寧寺), 휘주회관(徽州會館), 란가산(爛柯山), 용유석굴(龍遊石窟) 등이 바로 남방의 미녀처럼 우아한 기질로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구주의 명소들이다.

절강(浙江) 서부의 중심도시 구주는 전당강(錢唐江)의 상류, 금구분지(金衢盆地)의 서부에 위치하며 남쪽과 서쪽, 북쪽 삼면에 산발이 둘러서고 산발들 사이로는 여러 갈래의 강물이 구주를 감돌아 흐른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구주부성)

복건(福建)과 절강, 강서(江西), 안휘(安徽) 네 성의 교차점에 위치한 구주는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유리한 위치를 가진, 역대로 군사가들이 서로 다투는 군사 요충지였다.

과거에 신안(新安)이라고 불렀던 구주는 18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성이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일찍 5,6만 년 전에 이 곳에는 벌써 인류가 생존했고 3천여 년 전의 상(商)나라 후반에 현지인들은 문명단계에 진입했다.

2천 5백여 년 전 주(周) 나라의 작후(爵侯) 고멸(姑蔑)이 이곳에 절강 최초의 고성 고멸성(姑蔑城)을 축조했다. 당(唐) 나라 때인 621년 이곳에 설치한 구주(衢州)가 구주 도시사의 시작이 되어 그로부터 구주는 역대로 줄곧 주(州)와 도(都), 로(路), 부(府) 등 행정지역의 소재지가 되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공씨가묘)

구주는 예로부터 교육을 중시했고 그로부터 문화가 발달되었으며 문단의 거두와 학자, 민족영웅, 애국지사를 비롯해 사서에 이름을 남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구주 출신인 한(漢) 나라 고사(高士) 용구장(龍丘萇)과 당(唐) 나라 관리 서안정(徐安貞), 유명한 승려인 명과사(明果寺)의 대철선사(大徹禪師), 근대의 유명한 금석(金石) 서예가 여소송(餘紹宋), 국학의 대가 모자수(毛子水) 등은 각자의 연구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유구한 역사와 눈부신 문화는 구주에 풍부한 유산을 남겼다. 현재 구주에 보존된 여러 가지 문화재와 사적지는 구주 고성에 위치한 공씨가묘(孔氏家廟)와 구주부성(衢州府城)을 비롯해 2,040여 곳에 달한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고건물과 탑)

14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천녕사(天寧寺)에서는 천수천안(千手天眼) 관음상이 명물이고 효자묘(孝子廟)라고도 부르는 주선영왕묘(周宣靈王廟)에서는 남송의 성리학자 주희(朱熹)가 썼다는 ‘효(孝)’자가 명물이다.

천비궁(天妃宮)은 청(淸) 나라 때 건물이고 미타사(彌陀寺)는 처음에 관우(關羽)를 공양하다가 후에 불교와 유교가 어우러진 독특한 사원이며 신농씨(神農氏)를 공양하는 신농전(神農殿)은 1763년에 신축한 청나라 건물이다.

사람들은 ‘전각 아홉, 누각 여덟, 대청 열 셋’이라는 말로 구주의 많은 고건물을 형용한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에 나오는 ‘구주삼괴(衢州三怪)’는 또 구주에 신비로운 색채를 더한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구주부성의 성문)

산세를 따라 조성된 구주부성(衢州府城)은 2천여 년 전 한(漢) 나라 때 처음 축조해서 당(唐) 나라 후부터 수차에 걸쳐 보수했으며 현재의 구주부성 성벽은 절강의 11부(府) 중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성벽이다.

구주부성에는 현재 6개의 성문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 중 수정문(水亭門)과 대남문(大南門), 소남문(小南門), 동문(東門)이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다. 현재까지 보존된 성벽의 길이는 4km이고 높이는 3~5m이며 성밖에 조성한 해자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구주부성은 기존의 모습을 잃었지만 과거 관아의 서쪽 거리를 말하는 현서가(縣西街)와 과거 성밖 7리 되는 곳에 있던 칠리정(七里亭)과 가까운 칠리가(七里街) 등 여전히 사용되는 지명에서 과거 구주부성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사진설명: 공씨가묘의 일각)

구주는 ‘남공성지(南孔聖地)’라 불린다. 공자의 사당인 구주의 공씨가묘는 ‘이 세상에서 유독 둘 만 최고인데 하나는 산동(山東) 곡부(曲阜)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절강 구주에 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송(宋) 나라 때인 1128년 금(金) 나라 군대의 남침에 송고종(宋高宗)이 급급히 도주해 임안(臨安)에 도읍을 정하자 공자의 제48대 손인 공단우(孔端友)도 공자의 목조상을 가지고 남하했다.

산동(山東) 곡부(曲阜)를 떠나 장강을 건너 구주에 정착한 공단우는 곡부의 공묘(孔廟)를 모방해 공씨가묘를 지었고 그로부터 구주는 점차 남공성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란가산)

석실산(石室山), 석교산(石橋山)이라고도 하는 란가산(爛柯山)은 ‘왕질우선(王質遇仙)’ 전설로 유명하다.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 왕질이라는 청년 나무꾼이 나무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두 노옹이 바둑을 두는 것을 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왕질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끼 자루가 썩어서 없어졌다. 이상한 생각이 든 왕질이 마을로 돌아오니 세상이 완전히 다 바뀌어져 있었다. 원래 그가 산에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산 아래 마을에서는 백 년이 흘렀던 것이라는 전설이다.

이 아름다운 전설로 인해 란가산은 바둑의 선경이라 불리기도 한다. 해발고도 164m의 란가산에는 녹음이 무성해 아늑하기 그지없으며 멀리서 란가산을 바라보면 정상이 마치 거대한 석교를 방불케 해서 심히 장관이다.

(사진설명: 용유석굴의 일각)

구주에서는 현지인들에 의해 ‘세계 아홉 번째 기적’이라 불리는 용유석굴(龍遊石窟)을 빼놓을 수 없다. 수수께끼 같은 지하 건축물인 용유석굴에는 24개의 크고 작은 동굴이 질서 있게 산재하고 수직으로 지하에 조성된 동굴마다 굵은 돌 기둥이 내벽, 천정과 혼연일체를 이루어 감탄을 자아낸다.

인문과 예술, 문화, 공정기술을 한 몸에 모은 용유석굴은 고대 중국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지하인공건축물 중 하나이자 지하공간을 효과적으로 개발∙이용한 세계적인 기이한 경관이다.

구주는 물산도 풍부하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구주의 물산은 감귤과 개화용정차(開化龍頂茶)이다. 기록에 의하면 구주의 감귤 재배역사는 1400여년에 달하며 구주의 감귤은 품종도 다양하다.

(사진설명: 전통과 모던이 함께 하는 구주)

구주의 감귤은 과피가 붉고 과즙이 많으며 맛이 짙고 신 맛과 단 맛이 적절하다. 구주의 감귤은 특히 오래 저장할 수 있으며 저장시간에 따라 영양분도 더 많아지고 맛 또한 풍성해진다.

해발고도 1,000m높이에서 나는 개화용정차는 중국 10대 명차(名茶) 중 하나로 눈썹처럼 가냘픈 엽차에 하얀 솜털이 선명하다. 개화용정차를 우린 물은 연한 초록색이고 향이 맑으며 맛이 순하면서도 달콤하다. 이 차는 찻잎을 따는 데부터 시작해 마지막에 엽차가 만들어지기까지 완전하고 규범화된 제차 과정을 거친다.

이 밖에도 구주에는 전통적인 공법에 따라 수공으로 수십 가지 공법을 거쳐 만들어지는 용유선지(龍遊宣紙)와 천 년의 역사를 보유한 강산서연(江山西硯)도 있는데 구주의 이 종이와 벼루는 상등 문방사우로 인기가 많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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