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07-30 18:46:40 출처:cri
편집:朱正善

허저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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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저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적은 민족 중의 하나이다. 2000년 전국 제5차 인구보편조사결과로 보면 중국 경내 허저족 인구는 4675명이었다. 러시아 경내에 약 2만명의 허저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저족은 인구가 적지만 오랜 역사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민족이다. 이들은 흑룡강과 송화강, 우수리강 양안에 거주하면서 주로 어렵을 생계수단으로 해왔다. 허저족의 제일 직접적인 조상은 수,당 시기에 “혁말(革末)”이라 지칭했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떄에 허저족의 조상들은 “여진(女眞)”, “여직(女直)”으로 지칭했고 청나라 강희황제 때인 1663년이 되어서야 삼강유역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은 “허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허저족은 물고기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개를 잘 부렸기 때문에 한동안은 “어피부(魚皮부)”와 “사견부(使犬部)”로 지칭되기도 했다.

허저족은 부지런하고 용감하며 총명하고 질박하다. 이들의 총명함을 “널판자 두장이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널판자 석장이면 강과 바다를 넘나든다”고 평가한다. 인구가 적은 허저족은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고난을 겪고 또 차르러시아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받았으나 완강한 저항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지금까지도 중국민족대가정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유동과정을 거쳐온 허저족은 지금에 와서 대다수가 흑룡강성 동강시의 가진구허저족향, 팔차허저족향, 요하현의 사패허저족향, 가목사교외의 오기허저족촌과 무원현의 조길허저족촌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그외 흑룡강성의 가목사, 쌍압산, 장춘, 할빈, 베이징 등 시와 내몽골, 산동, 운남, 광서 등 성급지역에도 일부 살고 있다.

청나라 이전 시대의 허저족(1911년 이전)

허저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이며 그 조상은 상고시대의 순임금 때 식신의 구성부분이었으며 이들을 숙신, 직신이라고도 불렀다. 한나라, 위나라 떄에는 이들을 “읍루”라 불렀고 남북조 떄에는 “물길”이라 지칭했다.

수나라 때에는 물길을 말갈이라 불렀으며 말갈은 7개 부로 나뉘었는데 그중 율말부와 흑수부의 세력이 제일 강했다. 흑수말갈은 당나라 초에 방대한 연합체를 형성했으며 그 세력범위는 흑룡강유역 동쪽에서 동해해변지역까지 포함했다. 이들은 중원의 왕조와 긴밀한 연관성을 유지해왔다. 당나라 개원 10년(722년)에 흑수말갈의 두령이 장안에 와서 조공을 바쳤고 당현종은 그를 발력주자사로 임명했고 그 관아는 우수리강의 백력(지금의 러시아하바롭스크)에 정했다. 이는 중원의 왕조가 처음으로 흑룡강유역에 지방행정기구를 설치하여 이 넓은 변강지역을 통치한 것으로 된다.

허저족의 역사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당나라 초반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이를 틈타 흑수말갈이 그 세력을 송화강중류지역과 목단강, 우수리강유역에까지 신속히 확장했다. 당나라는 이 지역에 대한 관할을 중시하여 개원 12년에 흑수말갈에 흑수군을 설치했으며 개원 14년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자사를 두었다. 개원 18년에 흑수말갈의 두령 18명이 장안에 와서 공물을 바쳤고 이들은 중랑장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기원 947년 요나라가 북상하여 발해정권을 접수하였고 말갈을 통치범위에 넣었으며 이들을 여진이라 불렀다. 후에는 요나라 흥종의 명휘를 피한다는 이유로 여직이라 개명했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여직의 여러 부에 대한 압박이 극심했고 이로 하여 여직의 여러 부는 분연히 일떠나 반항했다. 기원 1115년 여직의 여러 부는 수령 완연아골다의 인솔하에 거란왕조를 뒤엎고 금나라를 세웠다. 금나라는 허저족 거주지역에 후얼하로라는 군정합일의 기구를 설치했다. 흑룡강하류에는 하리빈천호 등 관리기구를 세웠다. 이런 기구는 기층 군정합일의 준군사조직이었다.

원나라 때에 와서 동북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흑룡강입해구지역에 정동원수부를 세워 흑룡강, 우수리강과 동북의 광대한 지역을 관할 했다. 원나라 정부는 허저족이 집거한 송화강하류지역에 다섯개의 만호부를 세웠다. 원나라 때는 흑룡강하류 출해구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여 이곳에 관청을 세우고 대량의 선박을 건조했으며 수상교통선을 개통함으로써 이 지역의 경제문화의 발전을 추진했다.

명나라 때에 와서는 북방 여러 민족에 대해 회유정책과 이이제이의 정책을 펴면서 동북변경에 대한 관할과 통치를 강화했다. 특히는 송화강, 흑룡강, 우수리강 유역에서 동해에까지 이르는 지역에 대한 관리를 보강했다. 명나라 영락 7년(기원 1409년)에 흑룡강입해구의 특림에 누르간도사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 영락 11년(1413년)에 누르간지역에 영녕사비석을 재건하여 명나라가 이곳에서 주권을 행사한다는 점과 소수민족에 대해 안무정책을 실시한 업적을 기록했다.

명나라 떄는 여진의 여러 부가 재조합을 하는 시기였다. 명나라 초반 여진 여러 부의 명칭을 보면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이 있었다. 그중 건주여진은 장백산과 수분하, 목단강유역에, 해서여진은 금나라 완연씨의 후손으로 송화강중류, 아스하류역에 살았다. 야인여진은 송화강하류지역, 흑룡강중하류지역, 우수리강류역에 주로 살았다. 이중에서 야인여진의 세력이 재빨리 커졌고 이들은 목단강하류지역에서 건주여진과 전쟁이 발발했고 결과 건주여진이 패해 남쪽으로 이주했다. 건주여진은 50여년간 떠돌다가 요녕 쑤커쑤호하 지역에 정착했고 이들은 후에 만주족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야인여진은 건주여진을 쫓아낸후 여러 부락들을 점차 통일시켰고 후에 “허저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청나라 초반에 허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후르하부”, “워집부”,”와르카부”, “사견부”, “싸하린부”로 정했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후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방의 여러 부족을 병탄했다. 1599년부터 1644년까지의 기간에 허저족 거주지역에 대해 17차에 달하는 정벌을 감행했다. 이는 허저족의 여러 부락이 청나라의 침탈에 완강히 저항해 왔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후 청나라는 책략을 바꿔 회유정책을 펼쳤으며 그 정책이 효과를 보자 1644년 정월에 북방 여러 부락에 대한 병탄전쟁을 끝냈다.

청나라  강희 53년에 삼성성에 협령아문을 세웠고 군사를 관리하는 세관좌령을 임명했다.

삼성아문의 관할범위는 송화강하류,목단강, 흑룡강하류,우수리강류역에서부터 동해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청정부는 이 지역과 주변지역에 대한 관리와 통치를 강화했고 부락과 마을에 관리도 강화되었다. 청정부는 이곳에서 비교적 개명한 민족구역자치성격을 띤 조치를 취했기에 2백여년간 변강건설을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민족단결을 촉진했고 중원문화가 널리 퍼지고 생활수준이 점차 제고되었다.

중화민국 초에 이란현성과 부근 여러 마을에 사는 허저족의 대부분 사람들이 만족을 따라 민족성분을 만족이라 했다. 특히는 여러 마을들에서 농사일에 종사하는 허저인들은 청나라 옹정제이래 약 2백년을 거치면서 생산생활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고 어릴 때 민족언어를 상실한 일부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만족에 동화되었다. 당시 혼동강 연안에 사는 허저족이 1700명,우수리강류역에 400명으로 총 인구가 2100명에 달했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 일본 제국주의가 동북을 강점하고 그후 위만주국을 세운후 허저족인들은 반침략과 반노역, 반박해의 투쟁을 견지했다. 일본침략자들은 허저족들에게 흡연증을 발급하고 이들이 아편을 피우도록 유도함으로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편중독과 아편의존증이 생겼는데 이는 실제적으로 만성적인 학살이었다. 1932년에는 허저족의 거주지역이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된지 8개월말에 송화강특대홍수가 발생했고 이어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9월 3일에 중국인민은 소련홍군과 함께 전 동북을 해방했고 이때부터 허저족은 일본과 괴뢰반동세력의 통치에서 완전히 탈리했고 다른 곳에 쫓겨갔던 사람들도 고향에 돌아왔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하면서 허저족인들은 새로운 역사시기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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