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19-11-22 18:34:11 출처:cri
편집:朱正善

부랑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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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소수민족이며 부랑어를 사용한다. 이 언어는 남아시아어계 부랑어갈래에 속하며 부랑과 아와 두개 방언구역으로 나뉜다. 부랑족은 본 민족의 문자가 없다.

부랑족은 구두문화가 풍부한 민족으로 뚜렷한 특징을 가진 민족언어, 복장, 노래와 춤, 풍속습관을 보유하고 있다.

부랑족은 주로 운남성(雲南省) 시쐉반나 서남부의 국경지역에 살고 있다. 2010년의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로 볼 때 총 인구가 11만 9천명 정도였다.

시쐉반나에 살고 있는 부랑족은 “부랑” 혹은 “파랑(巴朗)”이라고 자칭하고 임창시(臨滄市)와 보안시(保安市)에서는 “우(烏)”라 자칭하며 묵강(墨江), 쌍강(雙江), 운현(云縣), 경마(耿馬) 등지에서는 “아와(阿瓦)” 혹은 “와(瓦)”로, 사모(思矛)에서는 “본족(本族)”, 난창현(澜沧縣) 문동향(文東鄕)에서는 “웡훙(翁拱)”, 진강(鎭江), 경동(景東)에서는 “우(烏)”혹은 “우인(烏人)”이라 자칭한다.

예전에 다른 민족이 부랑족에 대한 호칭도 달랐다. 쌍강 따이족은 부랑족을 “라(臘)”라 불렀고 라후족은 “카파”, “카푸”로, 시쐉반나의 타이족은 부랑족을 “먼(悶)”으로, 하니족은 “아버(阿博)” 혹은 아베(阿別)로 부랑족을 호칭했다. 현지의 한족과 이족은 “푸만(蒲滿)” 혹은 “푸만(濮曼)” 등으로 부랑족을 호칭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부랑족의 염원에 따라 민족명칭을 “부랑족”으로 통일했다.

부랑족 역사연구학계는 부랑족이 고대의 백복(百濮)민족군에서 기원했다고 인정하는 학자가 많다. 중국의 고서들은 오래전부터 백복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상서.목서》라는 책에서는 주무왕이 서남의 여러 부족을 토벌했는데 그 중에 복인(濮人)이 있다고 기록했다. 사학계는 《화양국지(華陽國志)》”의 기록에 근거해 “애로(哀牢)”와 복인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으며 영창 일대가 고대 복인들의 거주지였다고 인정한다. “복인”은 그 부족이 많고 분포지역이 넓었으며 오래전부터 난창강과 누강유역의 여러 곳들에서 살았고 그 중의 한갈래가 현재 부랑족의 선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서한(西漢)왕조때는 운남에 익주군(益州郡)을 세웠고 그 산하에 준당(嶲唐), 불위(不韋) 등 현을 세웠는데  현재의 보산시에 속한다. 자연스럽게 복인거주지역들도 서한왕조의 군현범위에 들어갔다. 서진 때는 영창 복인의 일부분이 남쪽으로 이주해 진강(鎭康), 봉경(鳳慶), 임창 일대에 정착했다. 당나라, 송나라 때는 남조(南詔)와 대리(大理)정권의 통치하에 있었고 주로는 채집과 수렵에 종사하는 경제생활형태였다. 그 후 농업생산으로 과도했다. 원나라 초반에 운남성 서부의 “푸인(蒲人)”들은 이미 철제호미를 사용했고 그 두령은 해마다 일정량의 호미를 원나라 정부에 진상품으로 바쳤다. 명나라 때는 순녕부를 설치하면서 푸인중의 귀족을 현지지부로 임명했다. 장기간의 민족이동과 부락, 부족의 분화와 융합을 거듭하면서 난창강과 누강 중하류 일대에 살고 있던 복인의 한갈래가 오늘의 부랑족으로 발전해왔다.

부랑족은 저항정신이 투철한 민족으로 역대 봉건통치자들을 반대해 기타 민족과 함께 많은 봉기를 일으켰다. 그중에서 청나라 함풍 11년(기원 1861년)에 있은 묵강 하니족과 부랑족 등의 봉기는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하니족인 전사랑(田四浪)이 봉기두령을 맡았고 참가자는 수천명에 달했으며 진원, 묵강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면서 7,8년간 싸웠다.

민국시기에도 부랑족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940년을 전후해 시쐉반나 서정(西定)의 부랑족들이 국민당군대의 잔혹한 통치에 항거해 봉기의 깃발을 들었고 라후족과 하니족인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민당정부가 파견한 진압군을 물리쳤다. 부랑족은 또 따이족 토사와 본 민족 집권자들의 통치에 지속적으로 반항했다. 1943년에 서정 만와채의 부랑족들은 두령의 식량징수를 반대한 투쟁을 벌였고 결국은 18명 두령의 반동통치를 전부 뒤집어 엎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부랑족인민들은 여러 민족과 함께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해 운남에서 애국투쟁을 전개했다. 항일전쟁 때 부랑산과 시쐉반나 서정의 부랑족들이 다른 여러 민족과 함께 일본과 시암(暹羅)군대에 공동으로 항거해 조국변강을 지키는 공을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전에 부랑족의 사회발전은 매우 불균형하였고 대체로 두 유형으로 나눌수 있었다. 그 하나는 임창지역과 사모지역에 거주하는 부랑족을 대표로 한다. 이들은 장기간 한족 등 기타 발전이 빠른 민족과 섞여 살면서 경제, 문화면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고 사회경제발전이 비교적 빠른 편이었으며 보갑제도가 실행되었다. 이런 지역들에는 지주경제가 이미 확립된 상태였다.

다른 한가지 유형은 시쐉반나의 부랑산, 서정, 파다 일대에 집거한 부랑족을 대표로 한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따이족 봉건영주의 통치를 받았으며 부랑족인들은 해마다 이들 영주에게 일정한 수량의 화폐 혹은 실물을 공물로 바쳐야 했다. 이런 통치는 부랑족사회가 가족단계에서 계급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깊은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50년대 초 부랑산구의 인민정권이 설립된 후 상급정부는 현지 실정을 감안하여 직접 사회주의단계로 과도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1985년 12월 30일 운남성은 여러 소수민족이 집거한 지역에 연합으로 된 자치지방인 쌍강라후족와족부랑족따이족자치현을 설립했고 부랑족은 자치현의 자치민족으로 되었다. 그외에도 부랑족이 상대적으로 집중된 멍해현 파다, 멍만과 멍강, 임창지역의 운현, 경마와 보산지역의 시전 등지에 기타 민족과 연합으로 된 민족향을 세웠다. 이들은 본 민족과 본 지역의 사무를 자주적으로 관리할 뿐만 아니라 국가사무와 소재지역 각 급 지방사무의 관리에도 평등하게 참여한다. 이들은 또 본 민족의 대표를 선거해 전국인민대표대회, 운남성인민대표대회와 각급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한다. 이와 함께 당과 정부는 부랑족 간부 양성에 알심을 들여 민족구역자치제도에 든든한 보장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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