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0-04-02 18:01:45 출처:cri
편집:朱正善

더앙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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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앙족은 붕룡족(崩龍族)이라고도 부르며 중국과 미얀마 국경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이다.  언어는 남아시어계 와족더앙족갈래에 속하며 부뢰(布雷), 루마이(汝買). 뤄진(若進) 등 세가지 방언이 있고 본 민족의 문자는 없다. 하지만 더앙족은 오래동안 따이족, 한족, 징퍼족 등과 함께 살아 이런 민족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더앙족은 주로 중국과 미얀마 접경지역에 살고 있으며 전형적인 대 분산, 소집거의 거주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 분포범위는 매우 넓어 중국에서는 운남성 덕굉(德宏), 보산(保山), 임창(臨滄) 등 세 지구급 지역의 9개 현과 시에 살고 있고 미얀마에서는 샨주와 카친주에 살고 있다.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로 보면 더앙족의 총 인구수는 2만 500명 정도였다.

더앙이란 민족이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기록시점은 청(淸)나라 때로 비교적 늦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동화록(東華錄)”, 왕창(王昶)의 “정면기문(征緬紀聞)”과 광서(光緖)황제의 “영창부지(永昌府誌)” 등에 당시 더앙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때는 이들을 “붕룡(崩龍)”이라 지칭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에도 이 명칭을 사용하다가 1985년 8월부터 본 민족의 요구에 따라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더앙(德昻)”이란 민족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앙(昻)”은 이들의 자칭이다. 더앙족의 언어중 “앙”은 산벼랑, 벼랑동굴 등의 의미를 가진다. 세세대대로 전해 내려온 이들의 옛 노래를 보면 더앙족의 선민들은 최초에 벼랑동굴에서 살았으며 “앙”은  선민의 이 역사에 대한 이들의 기억인 것도 같다. 더앙족은 원래 인구가 많고 많은 갈래를 가진 민족이었다. 현재 중국 경내에 살고 있는 더앙족은  루부레, 량, 루마이아 등 갈래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언어는 남아시아어계에 속한다. 사학계에서는 한나라, 진나라 때의 운남 영창에 살던 복인(濮人)을 더앙족의 선민이라고 보는 견해가 보편적이다. 복인은 그 분포범위가 넓었고 춘추전국시대에는 “백복(百濮)”이라 불렀다. 백복의 갈래도 복잡하며 그 명칭은 많은 부족들의 총칭이다. 그중에는 운남 최초의 토착주민이었던 여러 민족의 조상부락들이 포함된다. 한(漢)나라,진(晉)나라 시기에 더앙족은 “저요복(折腰濮)”이라 불렸다. 복인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운남서부지역에서 살고 있었고 고대 중국과 인도가 문화교류와 상업내왕을 하는 중간 기착지였다. 현재 일부 학자들은 이를 “남방실크로드”와 중국과 남아시아의 교류의 통로라고 평가한다. 더앙족의 선민들이 살던 곳이 바로 그때 물류교역의 중요한 집산지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원 6세기부 후반부터 10세기 말까지의 400여년간 영창(永昌) 경내 복인들의 사회경제가 한층 발전되었다. 그 선명한 특징은 가축과 철기를 농업에 보편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 방직에서는 다양한 색상의 염직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진보로 꼽힌다.

“금치(金齒)”는 원(元)나라 때의 지명으로 현재의 덕굉(德宏), 보산(保山) 일대를 지칭한다. 금치라는 이름은 금으로 치아를 감싸는 풍속에서 유래했다가 후에는 부족명칭으로 변화했다. 그중에는 더앙족 선민들의 부족도 있었다. 이를 원나라 사서에서는 금치국이라 불렀다. 원나라 때 금치국을 무력으로 정벌했고 금치국은 지속적으로 이에 저항하면서 그 경제가 피폐해지고 군사력도 크게 약화되었으며 정치세력은 날로 쇠락해졌다. 원나라 중반에 덕굉지역의 따이족 세력이 점차 흥기하면서 원나라 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이 영강(盈江), 로서(潞西)지역의 더앙 등 민족을 자기들의 세력범위에 두었다.

명나라,청나라 때에도 금치는 계속 쇠락을 이어갔다. 더앙족들은 여러차례 따이족통치자들을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으나 힘의 열세로 결국은 실패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날수밖에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초기 중국 경내의 더앙인들은 6천여명 정도였고 분산거주하는 형태였다. 대표적인 소집거, 대분산 형태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더앙족 인구가 적고 분산거주하며 거주지역의 사회와 경제발전이 불균형한 상황에 근거해 정부는 더앙족지역에 대한 민주개혁을 단행했다. 보산, 임창(臨滄)지역과 덕굉주 등지의 더앙족은 과거 따이족토사에 예속되었고 따라서 그 정치경제구조가 따이족과 같았기에 이들은 따이족과 마찬가지로 평화적 협상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 주요임무는 봉건영주와 지주소유제를 철폐하고 경작지를 더앙족 농민들에게 배분해 주어 이들이 경작지의 진정한 주인으로 되게 하는 것이었다. 얼마후 이 지역에서 농업합작화가 나타났다. 덕굉주 반산구(半山區)와 원정진(畹町鎭)의 더앙족이 따이족토사와 징퍼족관리들의 통치를 받아온 점을 감안해 정부는 이들에 대해서는 징퍼족과 마찬가지로 직접 사회주의로 과도하는 방침을 적용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당과 정부의 민족자치정책은 더앙족의 평등한 정치참여권리와 민족자치권리를 보장했다.

1953년 7월 덕굉 따이족징퍼족자치구가 설립되고 1956년 5월에는 자치주로 바뀌었다. 그중 더앙족 대표가 12명에 달했다. 1987년 12월에 로서시(潞西市) 삼대산(三臺山)에 전국의 유일한 더앙족단일향을 내왔다. 1988년 3월에는 임창지역의 경마현(耿馬縣)에 와족과 라후족, 리수족, 더앙족을 포함한 군새(軍賽)민족향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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