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0-07-23 16:12:51 출처:cri
편집:朱正善

머로족의 세시풍속과 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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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풍속:

머로족은 지금까지도 많은 원시적인 옛 풍속을 보류하고 있다. 이는 인류가 고대 혼인사를 연구하는 생생한 자료이다. 그 하나의 예로 머로족은 약혼 시 ‘계괘주’(鷄卦酒)를 마신다. 계괘주란 닭을 잡은 뒤 대퇴골로 길흉을 점치고 길상과 행운을 비는 것이다.”계과주’의 한어 원음은 음이 ‘길한 점괘’라는 발음과 비슷하다. 지금은 더는 원시적인 ‘신의 판단’에 맡겨 닭 대퇴골의 문양으로 길흉을 연구하지는 않으나 약혼 석상의 술을 전부 ‘계과주”  , ‘길한 점괘의 술’로 통칭한다.

‘계과주’는 여자 측 집에서 마신다. 사위가 미래의 장인과 장모에게 올린다. 첫 그릇은 장모에게 두번째 그릇은 장인에게 올리는데 장인은 술을 받은 뒤 ‘우리 딸은 자네 장모가 다 키웠다고 할 수 있지..그러니 애 어미의 뜻을 따르겠네”라고 아내를 치켜세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풍속이 인류 모권제 혼인에서 여성이 가부장적이던 유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머로족의 여성들은 시집갈 때 스스로 윗턱 대구치 1~2개를 으깬다. 이는 여성들이 남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 생겨난 풍속이라고 한다. 또 시집온 처녀는 아주 경외심을 가져야 할 존재라고 여겨 치아를 깨부수어야 결혼식을 올릴 엄두를 낸다.

그 외 ‘문틀 잡기’ ‘신부의 뒤 쫓기, ‘살수친’도 머로족의 혼인 풍속 중에서 아주 이색적이다. ‘문틀 잡기’는 신부가 친정을 떠나 시집갈 때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의미에서 두 손으로 문틀을 꼭 잡고 놓치 않는 풍속이다. 이 때면 중매꾼이 다가와 억지로 신부의 두 손을 문턱에서 떼어내어 친정을 나서도록 한다.

“신부의 뒤 쫓기”는 처녀가 출가 전 목놓아 울며 ‘곡가가’(哭嫁 歌)를 부르는 풍속이다. 신부는 또 결혼식 날,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도망’을 쳐야 하며 친정의 형수나 숙모 등 여성 친지들이 도망간 신부 찾기에 나선다. 신부는 또  친정을 떠나기 전에 친정의 조상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그리고 신부의 아버지는 딸의 옷깃의 단추를 반쯤 벗기는 것으로 출가한 딸이 더는 본가 씨족의 성원이 아니라 부가 씨족에 편입됨을 뜻한다.

‘살수친’은 신부가 신랑 집 문턱을 넘어설 때 시댁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맑은 물을 영친해온 사람들에게 쏟아 붓는 풍속이다. 맑은 물이 악마를 물리쳐 행운을 가져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민족과 다른 혼인 풍속을 본다면 머로족은 처녀가 시집갈 때면 양산을 펼쳐 든 영친과 송친 대오가 보행으로 신부를 신랑 집까지 데려다 준다. 신랑 집에 이르면 부모님에게 절을 올리는 등 의식은 행하지 않고 직접 침방에 들어간다. 혼수도 결혼식 날 시댁에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첫 아기를 출산해 만월이 차면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보내준다.

머로족의 혼인은 예전에 부모가 도맡았으며 혼수를 중히 여겼다. 히지만 지금은 이런 풍속이 변해 길일을 택해 결혼식을 올리고 신부는 양산을 펼쳐 든 영친과 송친 대오의 배동으로 시댁에 가 별도의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바로 신혼방으로 안내되는 풍속만 남아 내려왔다. 머로족은 결혼 후  “불락부가’의 풍속이 있다. 결혼 후 여성들은 신랑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집으로 돌아와 생산노동에 참가하고 어른들을 모신다. 그러다 농망기나 명절이면 시댁에 잠깐 돌아가 며칠씩 머물며 임신 후 아이를 출산해야만 시집에 정식으로 들어가 산다. 머로족은 일찍부터 장족과 한족들과 통혼하기도 했다.

장례 풍속:

머로족은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면 친지들에게 부고를 낸다. 만일 젊은 여성이 사망하면 친정에서 확인을 해야만 입관이 가능하다. 부모가 돌아가면 효자는 강가에 가 물을 길어다 망자를 목욕을 시킨다.  물을 긷기 전에는 강가에서 향을 피워 수신에게 답례한다. 목욕을 마치면 망자에게 몇 겹의 새 옷을 갈아 입히고 땅 위의 깐 돗자리에 모시며 이로써 인간이 죽으면 땅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자손들은 또 고기와 쌀밥을 망자의 입가에 얹고 밀리 실버로 눌러 놓은 뒤 관에 모신다. 그리고 ‘사공’(师公)을 청해 망자를 위해 제도한다. 묘지는 풍수사를 청해 길지를 정하고 ‘길일을 택해’출빈한다. 머로족은 1차장을 행하며 가족에 불운이 끼었을 때 유골을 찾아다 깨끗이 씻은 뒤 단지에 넣어 다시 매장하는 2차장을 행한다. 머로족은 꽤 오랫동안 상복을 입는다. 부모가 돌아가면 효자는 3년간 상을 한다. 집 안에 위패를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쌀밥을 올려 효도와 공경을 표한다. 3년이 지나면 음력 7월15일에 위패를 불사르며 상복을 벗고 탈상한다. 갑작스레 돌아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특수한 의식을 치른다. 그리고 아내가 먼저 돌아가면 출빈 시 남편이 왼손에 쥔 칼로 오른 손에 쥔 젓가락을 절단해 ‘부부의 관계’를 끊음을 표시한다.

금기사항:

머로족은 과거에 많은 금기사항이 있었다.

정월 초하루에는 빗자루질을 하지 못한다. 재물을 집밖으로 쓸어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 옷도 씻지 못한다. 옷을 씻으면 복을 씻어버린다고 여겼다. 그리고 장작을 패지도 못한다. 장작을 패면 재물신이 놀라 달아 난다고 여겼다.

그리고 2월 초하루날에는 밭에 들어서지 않는다.

6월 초하루날에는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

옥수수 종자를 뿌릴 때에는 첫 아홉 알을 뿌린 뒤 호흡을 멈추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집 문을 나설 때에는 밥이 설거나 부주의로 그릇을 깨는 것을 꺼린다.

머로족은 또 평소에 집 문 앞에 서 있거나 앉아있는 것을 금기시한다. 출산 또는 상사가 난 집에서는 외부인을 절대 집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산모는 아기가 40일이 되기 전에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며 우물가에 가 물을 긷지도 못한다. 머로족은 열정적으로 손님을 반기는 민족이며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권커니 자거니 서로 술을 권한다. 경사스러운 날이나 명절이면 술이 빠지 수 없다.

새 중국 창건 뒤 머로족의 신앙과 풍습에 모두 큰 변화가 발생했다. 미신 색채가 점차 사라지고 건강에 유익한 풍속만이 남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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