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8-27 18:16:21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0년 8월27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8월 네 번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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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월

갑:

이틀 전인 8월 25일은 음력으로 7월 7일, 칠석(七夕)이다.

칠석 명절은 중국에서 먼 옛날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한 때 보급되었고 송나라 때 흥성했다고 한다. 옛날 칠석 명절은 여인들만의 특별한 명절이었다.

칠석은 '견우와 직녀'의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로 하여 애정을 상징하는 명절로 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에는 제일 낭만적인 색채를 갖고 있는 전통적인 명절로 간주된다. 오늘날 '중국의 발렌타인 데이'라는 문화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2006년 5월 20일, 칠석절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의해 제1진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칠석의 많은 민속 가운데서 일부는 차츰 소실되었다. 그러나 상당한 부분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존속되고 있다. 비록 중국에서 발원했지만 조선반도와 일본, 베트남에도 칠석을 쇠는 습관이 있다.

한국에서 이날은 칠월칠석으로 불리며 은하수의 서쪽에 있는 직녀와 동쪽에 있는 견우가 1년에 한번 까치와 까마귀가 날개를 펴서 놓는 오작교에서 만나는 날이라는 설화로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칠석에 여러 음식을 즐긴다. 옛날에는 여름 끝에 나는 밀이 맛있다고 하여 밀을 이용한 밀전병이나 밀국수 등 밀로 만든 음식을 즐겼고 애호박과 오이, 참외가 좋은 시기라 애호박전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2.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성씨와 관련한 지명 이야기입니다.

 

  "양천 허 씨의 마을 조양천"

  조양천(朝陽川) 하면 이름자에 들어있는 내 천川자 때문에 강이나 시냇물을 눈앞에 떠올리기 십상이다. 마침 부르하통하가 조양천의 바로 뒤쪽을 유유히 흘러 지나고 있다. 부르하통하는 만족 말로 ‘버드나무의 강’이라는 의미인데 옛날에는 또 ‘별이 뜨는 물’이라는 의미의 ‘성현수(星顯水)’라고 불렸다.

  뭐라고 하든지 조양천은 꽃대에 앉은 매미처럼 강에 꼭 붙어있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조양천이라는 이름의 시원이 이 부르하통하로 되고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지명지(地名志)는 조양천은 다름 아닌 조양하(朝陽河)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름자가 붕어빵처럼 똑 같아서 조양천의 이름을 의례히 조양하에서 생긴 줄로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조양하는 북부의 할바령哈(爾巴嶺)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할바령은 안도현과 돈화시의 경계가 되는 산인데 만족 말로 ‘견갑골’이라는 의미이다. 조양하는 강물이 양지바른 남쪽을 향해 흐른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또 아홉 갈래의 물이 모여서 흐른다고 해서 일명 구수하(九水河)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은 장장 160리를 달린 후 조양천의 동쪽에서 부르하통하에 흘러든다.

  어쨌거나 조양하가 일부러 부르하통하를 첨벙첨벙 건너와서 마을에 자기의 이름을 선사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고 있다. 정말이지 누군가 미리 결론을 만든 후 억지로 꿰맞추기를 한 게 아닐지 한다. 오히려 이마를 딱 맞대고 있는 부르하통하가 조양천의 이름을 만들었다고 하면 모를까…

  지명지의 기록에 따르면 부르하통하를 이웃한 조양천에는 20세기 초까지 버드나무와 갈대가 숲처럼 무성했고 또 조개가 모래알처럼 널려 있어서 ‘진주영(珍珠營)’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조양천의 이 최초의 이름은 1910년 무렵 또 시냇물의 바다라는 의미의 ‘천수해(川水海)’라고 개명되었다. 산지사방에 널린 강과 작은 호수, 물웅덩이가 흡사 작은 바다를 방불케 했던 모양이다. 이때 이 고장은 일마평천日馬平川 즉 말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넓은 평야였고 또 부르하통하 남쪽의 양지쪽에 있었다.

  이에 따라 항간에는 조양천을 이름자 그대로 뜻풀이하는 설이 떠돌고 있다.

  “강의 남쪽 양지쪽의 평야라는 의미이지요. 조양천이라는 이름자에 들어간 글자들을 하나씩 뜯어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정말로 소경이 막대기를 헛짚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것 같다. 아닐세라, 연길 모 여행사 사장으로 있는 허응복은 그게 아니라는 말을 연거푸 곱씹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나온 양천(陽川) 허(許) 씨가 살고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조양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역시 조양천이라는 이름자를 그대로 뜻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갖춰진 그의 이 이야기에는 선뜻이 반론을 내놓기 어려웠다.

  양천 허 씨의 시조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 허선문(許宣文)이라고 전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허선문은 공암촌(孔巖村)에서 살았다. 공암은 통일신라 때 지은 지명으로 훗날 양천현(陽川縣), 양천군(陽川郡) 등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에 흡수된 고장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량을 보급해 주었던 개국공신 허선문에게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며 그때부터 허선문은 본관을 양천(陽川)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 후 양천 허 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 정승 16인 등 명인을 허다하게 배출하며 현재로선 한국에만 20여만의 인구를 가진 유서 깊은 명문벌족으로 되고 있다.

  14세기 말, 고려 충정왕(忠定王)의 부마이며 양천 허 씨의 15대손인 허징(許徵)은 정치사건에 휘말려들어 함경도 길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 하여 북쪽지방에 자리를 잡은 허 씨는 양천 허 씨의 일파인 용진공파(龍津公派)를 형성한다. 양천 허 씨의 이 후손들이 훗날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대륙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동북 3성에는 양천 허 씨가 적지 않게 거주하고 있다.

  연변의 양천 허 씨들은 한때 종친회를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럴지라도 허촌이 바로 양천 허 씨의 마을이라는 의미이며 조양천이 바로 이 허촌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건 잘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허촌은 마치 담장 기슭에 피어난 나팔꽃처럼 조양천이라는 이름의 그림자에 가려있었기 때문이다.

  허응복 역시 얼마 전에야 비로소 조양천 모교의 스승 지동운에게 우연하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때 그가 받은 감수는 충격 그 자체였다. 직업관계로 연변의 역사를 꽤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보다 그가 바로 양천 허 씨였고 또 다른 곳도 아닌 조양천 태생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의 의미를 실감케 했던 것.

  솔직히 그동안 비밀처럼 꽁꽁 감춰 있었던 양천 허 씨의 100년 신비를 하루바삐 벗기고 싶었다. 그래서 허응복은 조양천으로 예정에 없던 깜짝 방문을 하게 되었다. 지동운은 기실 오래전에 동료 허영학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그에게 알려줬다. 그맘때 지동운은 수학을 가르쳤지만 민족사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때 마침 허영학은 지동운과 함께 조양천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여태껏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비사秘史는 그렇게 빗장을 열게 되었다.

  1989년, 조양천 중학교에서 지리교원으로 있었던 허영학은 학생들에게 향토애를 심어주고자 조양천의 지명유래를 조사했다고 한다.

  지명지는 광서(光緖, 1875~1908) 초반 허 씨 성의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허촌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 정부의 관련부서에서 지명조사를 할 때 허촌에는 56가구 220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으며 전부 조선족이었다. 그 무렵 조양천에 살고 있던 사람들치고 허촌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허영학이 조사 작업을 할 시기 허촌에는 이미 허 씨 성을 가진 노인이 단 한명도 없었다. 이때 강북 마을의 웬 조선족노인이 조양천의 이왕지사를 잘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정작 허촌의 이야기는 부르하통하에서 고대하던 수석(水石)처럼 줍게 되었다. 그때는 조양천 부근의 부르하통하에는 지금처럼 다리가 없어서 배로 강 양쪽을 드나들었다. 그런데 뱃사공이 마침 허 씨 성의 조선족이었으며 그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온다.”고 말하는 걸까…

  “뱃사공의 말에 의하면 양천 허 씨가 무산과 회령 쪽에서 건너와서 이곳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양천 허 씨는 그 후에도 조양천에 부근에 와서 이삿짐을 풀었다. 20세기 초, 함경북도 길주의 양천 허 씨 허웅범 삼형제가 다른 성씨의 사람들과 함께 하룡촌(河龍村)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던 것. 하룡촌은 조양천 동쪽으로 약 15㎞ 상거,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이 만나는 합수목에 위치한다. 하룡이라는 지명은 마을 부근의 해란강에 수룡水龍이 있다고 소문나서 생긴 이름이다.

  각설하고, 1923년 천보산(天寶山) 부근의 노두구(老頭溝)부터 두만강 기슭의 개산툰(開山屯)까지 이르는 천도(天圖) 철도가 개통되었다. 조양천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나타나는 기차와 함께 이때부터 관방문헌에 버젓하게 등장한다.

  “허 씨 마을이 코앞에 앉아있는데 하필이면 다른 이름을 가져올 리 있었겠어요?”

  그러고 보니 이 고장 기차역은 바로 허촌의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뱃사공과 가진 대화는 마침내 허영학의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있던 의문을 푸른 강물에 말끔히 씻겨 보냈다.

  알고 보면 조양천은 허촌과 원체 처음부터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룡 마을이 부근 강의 신물(神物)을 갖다가 작명했듯 조양천 역시 부근 허촌의 양천 허 씨의 성씨를 갖다가 작명했다는 것이다. 허촌은 이 고장의 제일 이른 촌락이요, 양천 허 씨는 또 이 고장의 첫 주민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옛날 두만강을 건너왔던 양천 허 씨는 허영학이 뱃사공을 만날 때 벌써 아득히 먼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마을에 깃들었던 많은 사연들 역시 한 떨기의 낙엽처럼 배전을 스쳐지나 흐르는 물에 실려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혹여나?”하고 허응복은 옛 스승들을 모시고 다시 옛 허촌 마을 자리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기대는 금세 물먹은 담처럼 허물어졌다. 허촌은 도도한 물결처럼 거침없이 밀려오는 도시의 음영에 묻혀 더는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허응복은 허탈감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아직 옛 초가가 한 채 있어서 기척을 했더니 웬 한족(중국인) 노인이 나오시는 거예요.”

  허촌은 부근의 채농들이 들어가면서 중국인 마을로 변신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오래전에 벌써 다른 곳에 집단이주했다고 한다. 현지에는 허촌이 바로 그제 날의 조양촌 1대(隊, 촌민소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인제 양천 허 씨 마을의 옛 흔적은 다만 조양천이라는 지명에 밤하늘의 별처럼 어렴풋이 비껴 있을 뿐이었다.*

 

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노래 한곡)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

 

갑: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입니다.

  오늘은 청취자의 편지 사연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먼저 한국 김연준 청취자의 편지 사연입니다.

 

"긴 장마가 끝나고 전국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난 장마로 농촌과 산간지방에 인명피해와 함꼐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기상청은 전국에 폭염특보를 발령하고 온열질환 예방을 위해 야외활동과 옥외작업을 자제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코로나 상황은 서울.경기도에서 1일 200여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어 질병관리본부는 서울.경기 지역에 방역조치를 2단계로 격상하였습니다.

 

확진자 대부분은 안전수칙을 준수하지 않고 교회예배와 집회시위에 참석한 사람들로 방역당국은 접촉자를 추적하여 진단검사를 실시하고 방역도 한층 강화하고 있습니다.

청취자의 벗 프로그램을 통해 연변이민사가 방송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와도 맥이 닿아 있어 관심을 갖고 청취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윤영학 청취자님의 형님인 윤영희 열사 추모사진전과 혁명열사증명서를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내용을 잘 청취하였습니다.

행사에서 박철원 회장님께서 윤영학 청취자님의 글을 대독하셨는데, 건강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CRI 홈페이지를 통해 습근평 주석께서 안휘성을 시찰하고 홍수피해와 재해복구 상황을 요해하고 이재민을 격려했다는 내용도 잘 봤습니다.

홍수피해를 당한 모든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피해복구를 잘 마쳐 하루속히 일상을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네, 편지에서 건강을 문의한 윤영학 청취자에 대해 며칠 전에 박철원 청취자와 전화로 연락을 취했는데요, 윤영학 청취자는 현재로선 양로원에 계신다고 합니다. 건강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윤영학 청취자께서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길 함께 기대합니다.

 

다음은 한국 부산에서 살고 있는 박경용 청취자의 편지 사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방송을 통해 금년이 한국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건립한지 28주년이 되는 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주공제라고 불리는 한중관계가 앞으로도 나날이 발전하기를 희망합니다.

얼마 전에 양결지 중공 중앙 정치국 위원이 한국 부산을 방문하여 서훈 한국 국가안보실장과 의미 있는 회담을 열었습니다.

신형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인해 양국간의 교류에 장애가 있는데 이것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요즘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연일 지속되는데 개인위생과 함께 건강관리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좋은 방송 바라겠습니다."

 

코로나19, 이 전염병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한곳에 그치지 않고 있는데요,

한국에서도 여러 분들이 안전하고 건강하며, 또 이 코로나 사태가 하루빨리 진정되길 바라겠습니다.

 

[퀴즈 한마당]

갑:

지난주에는 8월 이달에 낸 퀴즈와 관련하여 많은 청취자가 답을 보내왔습니다. 어떤 청취자는 해당 답안을 찾으려고 7월에 방송된 내용을 모두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현지 지명 이야기와 이에 따른 다른 전설도 있다고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럼 8월 이달의 퀴즈 정답을 보내온 청취자의 이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길림성 연길시의 김봉숙, 리해숙, 조태산, 허애자, 김봉선, 김연옥, 김희숙, 박순자, 박계옥, 박인순, 김옥자, 김순옥, 리영자, 리선자, 이선자, 리련옥, 리종길, 최화원, 박경만, 박종근, 황순금, 김정자, 태봉선, 박상국, 박철원 등 25명

길림성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럽 남관구분회 제1조의

정수이, 리월남, 림귀인, 박만술, 황광주, 리만호, 김숙자, 리성자, 최동중, 리혜숙, 오인숙, 김옥선, 리제영, 강옥화, 장혜숙, 조명기 등 17명

그리고 한국의 구원모 청취자가 8월 이달의 퀴즈에 정답을 보내왔습니다.

네, 퀴즈 답안을 보내온 여러 분들에게 고맘다는 인사 전해드립니다.

네,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그럼 계속하여 8월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민과 관련한 연변 지명 퀴즈인데요. 지난 7월의 [청취자의 벗] 시간에 방송한 기사에 이 퀴즈의 답이 들어 있습니다.

 

네,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은 옛날 '무엇'이라고 불렸을까요.

 퀴즈 내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중국 연변의 국경도시 도문은 옛날 '무엇'이라고 불렸을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갑: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갑: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갑),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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