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9-17 10:02:31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9월 17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 세번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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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먼저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옛날 두만강 북쪽 기슭의 어느 산기슭에 살고 있는 충청도 이주민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리랑 고개의 정자바위"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남도치'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사투리를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때 어린 심범극은 고향 경상도와는 다른 이색적인 말투에 어정쩡해서 한동안 멀거니 서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정글 속의 원시부락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나 다름없었다.

  '남도치'는 경기도 남쪽 일대의 사람들을 이르는 연변의 사투리이다. 이 마을에는 말짱 남도 충청도 사람들이었다. 충청도 사람들은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두만강 기슭의 이 산골짜기에 문득 나타났다고 한다.

  1936년 8월, 괴뢰정부인 만주국은 일본의 주도로 첫 조선인 이민정책인 ‘재만조선인 지도요강(指導要綱)’을 제정한다. 이 요강은 “해마다 1만 가구의 이민을 조선으로부터 동북 경내에 이주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뒤미처 이 요강의 집행기구인 ‘선만척식주식회사鮮滿拓植株式會社’와 ‘만선척식유한주식회사滿鮮拓植有限株式會社’가 각기 서울과 신경(新京)에 설립되었다. 신경은 지금의 길림성 소재지 장춘(長春)이다. 1937년, 첫 패의 2,500가구 농민이 간도성과 봉천성(奉天省), 영구현(營口縣) 등 지역에 이주한다. 그때부터 1941년까지 4년 동안 많은 조선 농민들이 만주에 집단이민을 했던 것이다.

  1938년 정월, 충청도의 청주와 보은, 옥천군에서 떠난 이민대오는 도합 180가구였다. 이민대오는 두만강 기슭의 남양에 도착한 후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100가구는 북쪽의 왕청으로 가고 80가구가 이곳에 떨어졌다.

  나중에 이곳 마을은 서백림(西柏林)이라고 불렸다. 서쪽 골짜기의 어구에 위치하며 수림이 울울창창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함북도 태생인 심범극 옹은 졸지에 마을의 이방인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어린 친구들의 말을 구구절절 완정한 의미로 해독하는데 시일이 걸렸다. 동네 소꿉친구들은 말을 약간 끌면서 하듯 하고 느리게 했다. 어머니를 ‘엄니’, 아주머니를 ‘아주매’라고 불렀으며 밭의 고추를 ‘고치’라고 부르고 개구리를 ‘개구락지’라고 불렀다.

  그때 서백림의 마을 둘레에는 또 토성이 있었다. 이 토성은 1938년과 1939년 2년에 걸쳐 완공되었는데 너비가 4미터, 높이는 8미터나 되었다. 토성위에는 동서남북 네 군데에 포대를 쌓았다. 토성밖에는 또 키를 넘는 해자를 파고 있었다. 일본 경찰서가 향민들을 억압하여 이처럼 토성을 쌓고 집단부락을 만든 것은 당시 맹활약하고 있는 항일부대와 백성들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의 토성은 아직도 마을 뒤쪽에 수십 미터 정도 남아있었다.

  심범극 옹이 이사를 오던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8.15 일본 항복에 즈음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외지에 살던 충청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하나 둘 찾아와 빈자리를 속속 메웠다. 와중에는 10년 전 충청북도에서 함께 간도 땅으로 집단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중에 그들 가운데서 누군가 마을이름을 변경할 것을 극구 주장했다.

  “서백림이라는 이름이 좋지 않다고 했어요. 마을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을역사에 남을 이 주인공은 바로 왕청에서 이사를 왔던 서흥범이라고 심범극 옹이 밝힌다. 서흥범은 이민 1세로서 세시풍속, 혼례와 장례 제도 등에 밝은 사람이었다.

  새 사회에서 새로운 생활을 꿈꾸는 마음의 발로였을까?… 마을사람들은 선선히 이를 허락했다. 이리하여 1948년, 서백림은 북쪽 산등성의 정자(亭子)바위의 이름을 따서 정암촌이라고 고친다.

  정자바위는 옛날 군사들이 전망대로 사용하던 곳이다. 정자바위가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옛 성벽이 울타리처럼 골짜기를 빙 둘러싸고 있다. 산에는 일찍 고구려 때 축성하고 사용하던 천 년 전의 성곽이 있다. 이 성곽에는 온돌 유적이 있는 게 자못 특이하다.

  마을사람들은 정자바위 아래의 석두하(石頭河) 기슭에 늘 돼지머리 등 제물을 차려놓고 산신령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다. 옛 고향의 따스한 추억과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 민속은 어찌 보면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달래는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충청도 마을은 함경도 문화권인 연변에서 이 정자바위처럼 유표했다.

  1948년 정암촌에서 20여 가구가 따로 나와 석두촌의 북쪽에 밭을 일궜다.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솔밭자라고 불렸다. 이 마을은 나중에 소실되고 송전툰(松田屯)이라고 쓴 석물만 외롭게 길가에 남았다. 송전툰은 솔밭자를 중국말로 뜻을 옮겨 쓴 것이다.

  정암촌은 미구에 새마을 건설을 하면서 남쪽 방향으로 약간 자리를 옮긴다. 그래도 정자바위를 그냥 뒤에 업고 있어서 마을 지명의 근원은 버리지 않은 셈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지역 우위감이 정말 대단해요.” 심범극 옹은 마을의 텃세를 말하면서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면 마을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경상도 출신의 심범극 옹 가족이 정암촌에 이삿짐을 풀 수 있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의지를 따른 게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적인 행위였다.

  정암촌은 8.15 광복 전까지 북쪽 왕청현 춘방구(春芳區)에 속했으며 훗날 동쪽 훈춘현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 지역에는 아홉 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부락마다 훈춘에서 이주하는 세 가구의 이민을 통일적으로 받게 되었다. 심범극 옹의 가족은 마침 이 충청도 마을에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심범극 옹은 이 충청도 마을의 토박이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의 그림자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심범극 옹에게 예나 제나 “그 사람들”로 통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흥겨울 때는 노래를 했지요.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의 1번 노래는 “청주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심범극 옹은 인터뷰 도중에 요청에 따라 노래 한 가락을 멋지게 뽑았다

  그는 적어도 노랫가락을 건드러지게 넘기는 이때만은 어김없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세.

  울 너머 담 너머 임 숨겨두고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이하 후렴)”

  지금도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삼삼오오 모여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힘든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작 노래의 발원지인 충청도에서 이 “청주 아리랑”은 이미 실전되었다고 한다.

  정암촌은 더는 충청도 사람들만 살고 있는 외로운 섬이 아니다. 지리적으로 함경도와 가깝고 또 함경도 출신의 사람들이 인근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물결에 잠겨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지만 남도 충청도의 이름은 북쪽 골짜기의 옛 산성처럼 어느덧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정암촌은 중한 수교 전에는 여러 학자들이 찾아와서 남도 방언과 민속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멀어지고 있는 그리운 옛 이야기입니다.

 

[청취자의 편지 사연]

갑: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그럼 오늘은 먼저 한국 김연준 청취자의 편지 사연을 만나 보겠습니다.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선선함을 느낄 정도로 계절은 빠르게 가을로 가고 있습니다.

지난 2개의 태풍이 연이어 한반도 동쪽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서 동해안 어촌마을에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코로나19 환자가 한명도 발생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8일 습근평 주석께서 전국 코로나19 대처 표창대회를 성대히 개최해 유공자를 표창한 소식과 11일에는 과학자 좌담회를 통해 코로나19 전승의 관건은 과학기술에 의거하는 것이라며 중국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호혜적이고 공유하는 국제과학기술 협력전략을 이행할 것이라고 강조한 내용을 CRI 홈페이지를 통해 잘 봤습니다.

중국이 코로나19 백신개발에 성공하고 코로나전에서 승리한 것은 과학에 기반한 방역과 대처를 했기 때문으로 매일 환자가 발생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무척 부러운 모습입니다.

14일 한국의 코로나19 발생자는 109명으로 서울과 경기에서 약 70% 정도의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100명대의 환자가 발생하면서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2단계로 완화하여 자영업자는 영업이 가능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한국은 2주 후면 5일간의 추석연휴를 보내게 됩니다.

코로나19로 성묘나 가족친지 방문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권고가 있어 저도 성묘를 미리 다녀올 계획입니다.

올해는 예년 같지 않은 추석을 보내게 될텐데 마음만은 모두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한국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신청하니 방송에서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9월 13일

김 연준"

그럼 김연준 청취자가 신청한 한국노래 ‘그리운 금강산’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신청곡 '그리운 금강산']

네, 김연준 청취자의 신청곡 '그리운 금강산'이었습니다. 이 신청곡은 세계 평화와 민족 통일의 염원을 담은 노래였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인류의 하나같은 염원이겠지요.

  그러나 수해 등 재난은 늘 우리의 생활에 잠복해 있으면서, 평화로운 생활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김연준 청취자님dl 편지에 전했듯 지난 2개의 태풍이 연이어 반도 동쪽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면서 동해안 어촌마을에 피해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한국만 아니라 조선의 일부 지역 그리고 중국 대륙 동북부에도 피해를 입힌 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태풍 하이신으로 길림성 왕청 지역에는 인명피해까지 발생했습니다.

  이강춘 청취자가 왕청에서 보낸 소식 원고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지난 9월 7일 10시경, 태풍 "하이신"의 영향으로 길림성 왕청현에서는 홍수대처Ⅱ급 비상대응을 가동했다. 홍수방지임무를 접한 왕청현 당위원회 오승룡 조직부 부부장은 신속히 복흥진 흥화촌에 이르러 홍수방지 재해구조작업을 펼쳤다.

당일 18시경, 복흥진 흥화촌의 강은 급격히 불었고 급기야 제방을 넘어 마을로 범람하기 직전에 이르러 마을 촌민들의 생명재산을 엄중히 위협하게 되였다. 긴급한 관두에 오승룡 등 여러 지도간부들은 함께 군중대피사업을 조직했다. 그들은 폭우를 무릅쓰고 집집마다 돌면서 위험지대의 11가구 30여명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와중에 22시 30분경, 갑자기 제방이 무너지는 바람에 오승룡은 당시 흥화촌 주재 복흥진 당위원회의 사업대 대장으로 있던 장림과 함께 불행히 강물에 빠져 휩쓸려가게 되였다.

사건이 발생한 후 왕청현 정부와 당 위원회는 즉시 수색작업을 조직했다. 주, 현 여러 부문의 구조역량의 전력으로 되는 수색사업을 거쳐 9월 9일 새벽 5시 30분경, 사고발생지 하류에서 5km 떨어진 곳과 아침 7시 사고발생지 하류에서 7km 떨어진 곳에서 각각 두 명의 실종인원을 찾았는데 이미 숨진 상태였다.

9월 11일 아침 7시, 홍수방지 재해구조에서 희생된 오승룡, 장림의 추도대회가 왕청현장의관에서 열렸다.

왕청현 5000여명 간부 군중이 장의관 밖 광장에 모여 영웅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중공연변주위에서는 오승룡, 장림동지에게 “모범조직사업간부” (模范组工干部)칭호를 추서했다."

네, 지난 주 접한 소식 원고 가운데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거듭되는 태풍으로 여러 지역에서 피해를 입었는데요, 수해 복구 작업만으로는 복구할 수 없는 고통을 나누어 우리 모두 함께 부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갑:

  먼저 9월의 퀴즈답안을 보내온 박철원 청취자의 편지 사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철원 기자는 퀴즈답안에 나오는 '조양천의 지명'의 다른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회막골이라고 불리던 도문에서 살다가 조양천에서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1964년 고중을 졸업하면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고중시절 우리 학급에 허화선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 연길시 신흥가두에 살고 있는데 이번 퀴즈 문답 이야기로 그와 연락하니 그분이 바로 '조양천 지명 이야기'에 나오는 성씨였고, 족보에 20대 후손으로 등록되어 있었답니다.

조양천진 서쪽에 따로 떨어진 자그마한 부락이 있었는데 모두들 <허촌마을> 혹은 <허천마을>이라고 불렀고 그 후로 조양공사 조양1대라 하였습니다. 그 마을 가운데 콘크리트의 흰 벽돌로 지은 집 한 채가 있었는데 일제 때 사무소로 사용되고 그 후로 야학교, 보습반, 생산대 창고로 쓰이다가 지금은 부락이 전폐되고 부근은 논밭과 양어장들로 변했습니다.

거기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근로촌이라고 있는데, 역시 허씨들의 큰 부락이었다고 허화선씨가 소개했습니다.

해가 잘 들고 물이 많은 벌판인데, 허씨들이 (조양천) 주변에 많은 논을 풀었는데 북쪽으로 청개덕이라는 논벌의 농사는 지금도 잘 되고 있습니다.

9월 퀴즈의 답을 애청자모임에서 아래 분들에게 읽어 드렸습니다.

김봉숙 리해숙 조태산 허애자 김봉선 김연옥 김희숙 박순자 박계옥 박인순 김옥자 김순옥 리영자 리선자 리련옥 리종길 최화원 박경만 박종근 황순금 박상국 등 입니다."

  네, 보내온 퀴즈 답안도 정답이지만, 퀴즈 답안에 깃든 또 다른 이야기가 귀맛에 당깁니다. [청취자의 벗]에 나오는 지명 이야기를 더 깊이 발굴해 주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한 박철원 청취자님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9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계속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의 지명 ‘조양천’에 냇물 천(川)자 들어있는데요,

  여기서 ‘조양천’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지명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조양천’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갑: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갑: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갑),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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