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0-09-24 14:12:13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9월 24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 네번째 주의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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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명과 연변

계속하여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주의 충북도 마을 '정암촌'을 이어 또 다른 이민 마을이었던 왕청 지역의 '하마탕'의 이야기입니다.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없는 개구리마을

  “옛날 옛적 어느 연못가에 개구리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마을에는 개구리를 통치하는 왕이 없었습니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개구리마을’의 한 단락이다.

  정말이지 ‘개구리마을’이 책에서 훌쩍 뛰쳐나오지 않았나 싶다. 하마탕은 음역한 지명으로 실은 개구리의 못이라는 의미의 합마당(蛤蟆塘)이기 때문이다.

  어딜 갈까 하고 망설이는데 누군가 촌민센터에 가면 마을의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줬다. 아니나 다를까, 따뜻한 온돌방에 노인 예닐곱이 밥상에 빙 둘러앉아 포커놀이를 하고 있었다.

  좌상은 윤창규(78세) 옹이었다. 마침 충청북도 태생으로 세 살 나던 1938년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다. 바로 그해 충청북도에서 180세대의 집단이민이 한꺼번에 간도에 진출하는데 그중 80세대는 도문의 정암촌(亭岩村)을 형성하고 100세대는 왕청의 하마탕으로 들어왔다는 설이 있었다.

  그런데 좌석에서 충청북도 태생은 윤창규 옹 단 혼자였다. 들어보니 하마탕 마을에서 충청북도 사람들은 ‘소수민족’이었고 함경도와 강원도 태생이 ‘주체민족’으로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 하마탕촌은 ‘함경도마을’과 ‘강원도마을’의 합체라고 한다. 1935년, 함경도의 집단이민 100세대가 전하(前河)의 북쪽에 배치되고 강원도의 집단이민 100세대가 전하의 남쪽에 배치되었다. 전하는 하마탕 지역 가운데 있는 산마루의 앞쪽을 흐른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이에 앞서 이 고장에는 벌써 수십 가구의 부락이 있었는데, 동네에 큰 느릅나무가 있다고 해서 대과수(大果樹) 부락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집단이민으로 큰 부락을 형성한 후 마을이 흥성한다는 의미로 신흥툰(新興屯)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신흥툰은 1981년 향 소재지로 되면서 하마탕촌이라고 개명했다.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하마탕은 원래 저지대의 습지였고 늪이 많았으며 또 개구리가 많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기실 예전에는 개구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진펄에는 고인 물이 많았으며 이 물은 더럽고 썩어서 식수로 사용할 수 없었다. 혹여 잘못 먹기라도 하면 사람이 병에 걸려 죽는다고 했다. 이런 고장은 개구리가 알을 치는데 맞춤하겠다고 해서 하마탕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하마탕은 ‘충북마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충청북도의 집단이민은 왕청에 이른 후 부락을 이루지 않고 제각기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것일까…

  좌중에 이 의문거리를 내놓자 윤창규 옹은 대뜸 머리를 흔들었다. “제가 살던 마을에는 충청북도 사람들만 있었는데요.”

  윤창규 옹은 워낙 하마탕 북쪽 계관향(雞冠鄉)의 화가영(火家營)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때 화가영에는 약 90 가구가 있었는데 전부 충청북도 이민들이었다는 것. 왕청에서 찾을 길 없던 ‘충북마을’은 바로 이 화가영에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계관향은 민국(民國, 1912~1949) 초기에 생긴 마을로 원래는 여덟 가구의 인가가 있었다고 해서 ‘팔가자(八家子)’라고 불렸다. 팔가자라는 이 동명의 마을은 훈춘과 화룡에도 나타난다. 훗날 부근에 닭볏 모양의 벼랑이 있다고 해서 ‘계관라자(雞冠砬子)’라고 불렸고 그게 나중에 마을과 향의 이름으로 고착되었다고 한다.

  문득 누군가 윤창규 옹의 말을 중동무이했다. 화가영이 아니라 곽가영(霍家營)이라는 것. 화가영과 곽가영은 중국말로 발음이 비슷하다.

  그러자 윤창규 옹은 버럭 화를 냈다.

  “이보게, 거기에 살았던 사람이 모르겠나? 분명히 화가영이라고 했다니까.”

  뒷이야기이지만, 지명지에는 진짜 화가영이 아닌 ‘곽가영’이라고 적혀있었다. 해방(1945.8.15) 전에 곽 씨(霍氏) 성의 사람이 목이버섯을 기르고 사슴을 사육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워낙 1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여건이 되지 않아서 전부 이주했다는 것. 그야말로 지명을 새라고 한다면 오장육부를 다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정작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있었다. 강덕(康德, 1934~1945) 연간의 “왕청현 지도”에는 분명 마을을 화가영이라고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면서 난리통(판)이었지요. 그래서 해방이 나던 해 전부 자리를 떴어요.” 윤창규 옹은 이렇게 설명을 달았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에 진출하면서 조선인들은 뜻하지 않던 화를 입게 된다. 소련군은 키나 생김새가 비슷한 일본인과 조선인을 좀처럼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오인하여 연행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일부 소련군은 또 농가에 뛰어들어 가축을 빼앗고 부녀자를 강탈하는 짓도 자행했다.

  이 무렵 관내에서 진출한 국민당 군대와 지방군, 토비들은 자주 조선인마을을 습격했다. 일제 치하에서 산처럼 쌓였던 울분을 엉뚱하게도 무고한 조선인들에게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괴뢰 만주국은 배급에 차이를 두는 등 방법으로 일본인을 1등 공민, 조선인을 2등 공민, 중국인을 3등 공민으로 인식시키는 차별정책을 실시했다. 실제로는 조선인을 차별했지만 또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일본의 앞잡이’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때 북만주에서 사문동(謝文東)이 거느린 토비무리가 조선인마을 하나를 거의 도륙하다시피한 사건도 있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포한 후 조선인들은 웃음을 미처 땅에 떨어뜨리기 전에 난데없는 불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다.

  화가영은 목단강(牡丹江)에서 왕청으로 나오는 길목에 위치, 더구나 불 방석에 올라앉은 격이었다. 누군가 부랴부랴 이삿짐을 싸들었고 뒤이어 이웃들도 하나 둘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침저녁으로 밥 짓는 연기를 뿜어 올리던 화가영은 불과 몇 달 사이에 정적만 감도는 음산한 ‘귀신마을’로 되었다.

  곽가영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64년에 중국인들로 형성된 마을이다.

  “화가영은 무슨 감시초소 같은 게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요?” 윤창규 옹은 나름대로 마을이름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옛날 봉화대에 불을 지피 듯 토비가 오게 되면 연기를 피워 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지레짐작이었다. 그러나 화가영에는 옛 봉화대의 유적은 물론이요, 연기로 토비들의 소식을 알렸다는 기록이라곤 없다.

  윤창규의 일가는 나중에 하마탕에 와서 이삿짐을 풀었다고 한다. “다들 어디에 가서 살고 있는지 몰라요. 여기에 떨어진 건 우리 한 집뿐입니다.”

  그렇다고 토비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다. 현성과 수십 리 떨어져 있었던 하마탕에는 토비들이 사흘이 멀다하게 들락거렸다. 지어 민가에 기거하면서 밥을 지어 올리라, 닭을 삶아 올리라 하면서 사람들을 들볶았다고 한다.

  기왕에 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망정이지 조선인들은 이주한 이듬해부터 하마탕의 밭과 습지를 개발, 해방 전까지 수십 정보의 논을 풀었다고 한다. 산종(散種) 즉 주로 볍씨를 직접 논에 뿌려 싹 트게 하는 농사법을 채용했다고 한다.

  미구에 토비들은 조선의용군 부대가 오게 되자 동사방대(東四方臺) 쪽으로 부랴부랴 도망했다. 동사방대는 하마탕향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10㎞ 상거, 산봉우리가 네모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동사방대 산정에는 옛성 유적이 있는데 천 년 전의 발해국 공주 홍라녀(紅羅女)가 백성들을 이끌고 웅거했다고 한다. 정말 요새로서는 손색이 없었던가 보다. 일설에 북만주의 어느 유명한 토비두목의 딸도 언제인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동사방대의 옛 성에 칩거했다고 전한다.

  이런 토비를 숙청한 부대에는 조선의용군 5지대를 위시한 조선인장병들이 적지 않았다. 1946년 그들은 북하마탕에서 토비들과 격전을 벌여 끝내 하마탕의 토비우환을 제거한다. 연변지역에서 토비숙청 작전은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진행되었으며 무려 1만 여명의 토비를 섬멸했다.

  한때 개 짖는 소리와 닭울음소리가 사라졌던 하마탕에는 마침내 생기가 다시 돌았다. 순 조선족마을로 번성했던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벌써 200여 가구로 몸집을 불렸다고 한다. 일찍 1937년 설립된 하마탕의 조선족중심소학교도 전성기에는 학생이 300여명을 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우리 마을을 5백호 동네라고 불렀지요.”윤창규 옹의 말에는 자부심이 그대로 배어나고 있는 듯 했다.

  그러자 밥상에 둘러앉았던 노인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타령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먼. 150가구도 되나마나 한 게 벌써 언제인가.”

  조선족중심학교는 이미 폐교되었다고 한다. 하마탕향은 2005년 이웃한 대흥구진(大興溝鎮)에 합병되었고 하마탕촌은 옛 이름인 신흥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흥구는 황량한 골짜기의 어구에 있다고 해서 대황구(大荒溝)라고 불리다가 상서로운 의미를 담아 개명한 이름이다.

 

네, 연변의 지명과 이 지명에 깃든 이야기이었습니다. 도시화의 영향으로 마을이 줄어들고 지어 사라지는 것은 지구촌 어디서나 일어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시골마을에 가면 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 들리고 마당에서는 어린이들이 조잘거리던 그 때 그 정경은 점점 옛말로 되는 것 같습니다.

  노래 한곡 듣고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청취자의 벗 편지 사연]

갑: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는 ‘편지가 왔어요' 시간입니다.

  오늘은 먼저 한국 부산의 박경용 청취자가 9월 17일 보내온 편지 사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 부산에서 살고 있는 청취자 박경용입니다.

방송을 통해 중국 국가주석과 독일 총리, 유럽연합 의회 의장, 유럽연합이사회 위원장과의 회담 소식을 잘 들었습니다.

부산에는 9월 17일자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재연장을 실시했습니다.

하루빨리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부터 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는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한국은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연장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한국 최대의 명절인 추석 연휴가 다가옵니다. 코로나19 사태의 이 비상시기에 모두들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박경용 청취자님과 더불어 우리 모두 코로나19의 영향에서 하루빨리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이어서 길림성 장춘시 김수금 청취자의 편지 사연 만나 보겠습니다.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럽에 클럽의 회가가 출범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청취자의 벗 담당자 앞:

안녕하십니까? 청취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편집, 방송하시느라 다들 수고 하십니다.

추석에 즈음하여 오곡들이 우쑥우쑥 자라나 열매를 맺고 바야흐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벼 이삭은 머리 숙여 황금의 파도를 이루고, 옥수수는 벌써 밥상에 올라 입맛을 당기고 있습니다. 파, 무, 배추는 푸른 바다를 이루고 수확을 기다리고 사과와 배, 포도 등 과일은 울긋불긋 대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가을 수확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수확의 이 계절, 장춘 애청애독자클럽은 회가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럽의 노래”를 창작, 9월 7일 ‘회가’의 탄생을 선포했습니다. 다들 수확의 기쁨 속에서 회가를 배우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회가의 출범은 우리 클럽의 대사이며 희사입니다. 클럽이 설정된 15년만에 마침내 클럽의 회가가 탄생되었으니 어찌 희사가 아니겠습니까.

노래의 가사는 문학소양이 깊고 번역수준도 높으며 학문이 깊고 덕망이 높은 클럽 회장 김수영 선생이 직접 작사했습니다. 그리고 장춘시 군중예술관의 작곡가 김기철 선생이 회가를 작곡했습니다. 김기철 선생은 음악수준과 지식이 높은데, 작곡가로 이름을 널리 알린 분입니다.

회가의 가사는 우리 클럽의 취지를 잘 표달했다고 봅니다. 클럽 회원들이 저마다 우리말과 글을 지켜가며 조선민족의 얼을 대대손손 전해가려는 소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수의 아름다운 시입니다.

회가 가사가 나오자 장춘시 군중예술관 이상호 부관장은 저명한 작곡가를 모시려는 우리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여 김기철 선생을 찾았습니다. 김기철 선생은 예술관 공연 종목을 창작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국 각 지역 방송드라마 작곡 요청이 쇄도하여 아주 다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를 타서 우리 클럽의 회가를 직접 작곡했습니다.

회가가 나오자마자 회원들은 “참 좋아요” 하고 저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회원들마다 어서 빨리 회가를 배우자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김기철 선생은 정말로 회가의 내용을 잘 포착한 것 같습니다. 선률이 즐겁고 경쾌하며 부르기 또한 쉽고 입에 잘 오릅니다.

이 회가를 편지와 함께 동봉합니다. 방송에도 이 회가 가사를 올릴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으로 여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9월 18일

장춘애청애독자클럽 제1자동차그룹분회 김수금 올림

 

네,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럽에 회가가 탄생했다는 소식인데요, 회가는 클럽의 주제가이자 상징입니다.

클럽의 회원들과 더불어 우리 방송인 또한 깊은 자랑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 김수금 청취자가 보내온 회가 가사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가 “장춘시 애청애독자클럽의 노래

         김수영 작사

         김기철 작곡

장백산 기슭에 진달래꽃 만발하고

광활한 대지에 아리랑 노래 메아리 치네

우리말과 우리글 이 땅에서 꽃이 피고

우리겨레 백의 혼을 대대손손 이어가네

아~ 우리는 민족 얼을 지키는 애청자

민족문화 번영과 발전이 우리의 소망이라네.

중화의 대지에 백화가 만발하고

강물은 도도히 바다로 흘러 드네.

형제민족 손잡고 행복을 노래하고

민족문화 모두 모여 중화문화 이루었네

아~ 우리는 민족의 얼을 지키는 애독자

중화문화 번영과 발전이 우리의 소망이라네.

 

장춘 애청애독자 클럽의 15년의 사랑과 성장의 큰 모습을 가사로 보고 인제 또 노래로 들을 수 있겠지요.

클럽 회원들이 부르는 이 회가를 하루빨리 우리 방송으로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다음 코너로 이어가겠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이달에는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9월 이달에도 지명과 관련한 퀴즈를 계속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변의 지명 ‘조양천’에 냇물 천(川)자 들어있는데요,

  여기서 ‘조양천’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지명일까요?

  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조양천’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장춘 애청애독자클럼 제1자동차 그룹분회 김수금 청취자는 여러 회원님들과 함께 9월의 지명 퀴즈 정답을 이메일로 알려왔습니다.

김수금 청취자와 함께 정답을 보낸 분들은

라명희, 주송숙, 주혜숙, 박숙녀, 양두봉, 오애화, 허희숙, 한란희, 윤영선, 정이순, 리명희, 박룡익, 박영희, 박옥순, 정성갑, 방채식 등 17명입니다.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갑: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성에 진행에 박은옥(갑),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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