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 대표들의 서로 다른 운명에서 공산당이 걸어온 고난의 여정을 읽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1년 7월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제1차 전당대회에는 13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당시 그로부터 28년 후인 1949년에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고 전국적인 정권을 장악하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 때 그렇게 생각했다면 13명 대표들의 운명이 이렇게 엇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13명의 대표 중 천궁보(陳公博)와 장쿼타오(張國燾) 등 3명은 당에서 제명당하고, 리다(李達)와 저우퍼하이(周佛海) 등 4명은 탈당했다. 13명 중 과반수인 7명이 당적을 박탈당했거나 탈당한 것이다. 그 중 저우퍼하이와 천궁보는 악명이 자자한 매국노가 되어 국민정부에 의해 사형되었으며 장궈타오는 국민당에 가입해 공산당의 대립 면에 섰다.
그리고 왕진메이(王盡美)는 1925년에 희생되고, 덩언밍(鄧恩銘)은 1931년, 허수헝(何叔衡)은 1935년, 천탄츄(陳潭秋)는 1943년에 희생되었다. 그러니 13명 대표 중 마오쩌둥(毛澤東)과 둥비우(董必武) 2명만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 과정을 경험했다.
이 13명 대표의 운명을 통해 중국공산당이 “제1차 전당대회를 상하이에서 개최하다가 쟈싱(嘉興)의 남호(南湖)로 옮겨 회의를 계속 했고 남호의 홍선(紅船)에서 솟아오른 붉은 태양이 눈부신 빛을 뿌려 이 곳에서 뻗어나간 붉은 벨트가 징강산(井岡山)에 이르고 다시 옌안(延安)을 통해 톈안먼(天安門)까지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다”는 낭만적인 서술의 꽃 길만 걸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13명 대표의 운명을 통해 중국공산당은 백 년의 여정에서 고난의 길을 탐색하며 한 발자국씩 어렵게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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