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두슈(陳獨秀)가 중국공산당을 코민테른으로부터 독립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리리산(李立山)이 그 뒤를 이어 공산당 독립의 큰 꿈을 꾸었다. 리리산은 개성이 천두슈와 아주 유사했고 성격은 천두슈보다도 더 불 같았으며 ‘탱크’라 불릴 정도로 모든 일에서 선두를 달리는 행동파였다.
리리산은 공산당 창당 후 큰 공을 적지 않게 세웠다. 첫째, 안위안루(安源路) 路矿:意思是铁路和矿山的合称 철도광산클럽의 장을 맡았던 리리산은 1922년 안위안철도 광산파업의 주요 리더 중 한 사람이었다. 안위안철도광산 파업은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으로 지휘한 첫 노동운동이었고 그 뒤에 ‘2,7대파업’과 ‘5,30운동’이 실패하고 많은 당원들이 살해되면서 안위안철도광산 파업은 대혁명시기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성공사례였다. 또 1924년말 중국공산당의 당원은 도합 900명이었고 그 중 안위안철도광산의 당원이 300명이었다. 이로부터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둘째, 리리산은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역사에서 유명한 난창(南昌)봉기의 주요 리더 중 한 사람이었다. 1927년 7월 리리산은 우한(武漢)의 혁명역량을 상하이(上海)로 전이시키기 위해 난창을 경유하다가 난창 근처에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주둔한 상황을 알고 중앙에 난창봉기를 제안했다. 리리산은 역사적 기회를 제때에 발견하고 행동에 옮겨 공산당의 혁명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큰 공을 세운 리리산은 코민테른으로부터의 독립만 시도한 것이 아니라 코민테른을 지휘할 생각까지 했다. 그의 이 ‘리산의 노선’은 리리산 본인에게 큰 문제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중국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리산의 노선’이 어떤 내용인지 보자.
리리산은 “시골은 지배계급으로 말하면 사지에 불과하고 도시만이 그들의 머리와 심장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지만 자르지 말고 그들의 머리를 자르고 그들의 심장을 폭발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근로자 계급 최후의 투쟁인 무장폭동에 의지해야 한다”며 마오쩌둥(毛澤東)의 농촌근거지(農村根據地)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리산은 중국혁명의 실제상황에서 벗어나 ‘참수’를 주장하는 ‘리산의 노선’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와 펑위샹(馮玉祥), 옌시산(閻錫山)이 중원지역에서 대전을 벌였다. 리리산은 이는 세계대혁명이 눈앞에 닥친 전에 없는 대사건이라고 인정하고 중심도시의 무장폭동을 배치하는 동시에 전국의 홍군(紅軍)을 재편성해 대도시 공격을 계획했다. 리리산은 중국혁명이 세계혁명의 마지막 결전장이 될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소련은 5개년 계획을 포기하고 전쟁준비에 돌입해야 하며 몽골은 중국의 폭동이 승리하면 즉시 중화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하는 선언을 발표해야 한다고 했다. 또 소련은 시베리아에 있는 10만 명의 중국 근로자들이 몽골을 거쳐 중국을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리리산의 이 계획은 코민테른과 소련의 반대를 받았다. 코민테른은 즉각 중국공산당 중앙에 대한 모든 활동경비 제공을 중단했다. 그 바람에 코민테른의 자금지원을 받던 리리산의 상하이 사무실 업무가 곤경에 빠졌다. 동시에 중원전역이 끝나기도 전에 장제스가 이른바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장시(江西) 삼성 비적토벌 총지휘’를 임명하며 공산당 진압을 계획했다.
리리산의 ‘리산의 노선’이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었다. 천두슈와 리리산의 독립시도가 모두 실패한 경험과 교훈은 한 정당의 독립여부는 리더의 주관적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립의 객관적인 여건을 마련했는지 여부, 혹은 리더가 그런 개관적인 여건을 마련했는지 여부에 관계됨을 말해준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코민테른에 대한 의존관계를 개변하려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험을 쌓아야 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했고 이는 독립을 위한 최저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1930년 리리산은 정치국 위원직위에서 해임된 후 모스크바에 전근되어 15년간 소련에서 지냈다. 1946년 중국에 돌아온 리리산은 ‘리산의 노선’의 형성과정과 실패의 원인, 리더의 책임을 분석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축제에서 리리산은 전국총공회(全國總工會) 대표의 신분으로 마오쩌둥 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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