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대혁명의 실패에서 시작해 팔칠회의(八七會議)에서 “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견해를 제출하기 까지, 추수봉기에서 시작해 징강산(井崗山) 투쟁에 이르기까지 마오쩌둥(毛澤東)은 어려운 탐구를 거쳐 적으로부터 독립될 뿐만 아니라 벗으로부터도 독립되고, 정치적으로 독립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독립된, 완전하게 독립된 중국혁명의 길을 모색했다. 이 혁명의 길은 중국공산당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가장 주요한 기반임을 사실이 증명한다.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 후 마오쩌둥의 머리 속에서 아직 농공(工農) 무장이 할거하고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이 길이 완전하게 형성되지 못하다가 그 해 8월 7일 팔칠회의에서 이런 사상이 상대적으로 성숙되어 “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출했다. 그 해 9월 29일 싼완(三灣) 개편에서 마오쩌둥은 중대에 중국공산당 지부(支部)를 둘 것을 제의했으며 그 해 말에 징강산 투쟁속에서 농촌 근거지를 다지고 공농무장의 할거를 실현할 것을 제출했다. 이 것이 바로 마오쩌둥의 사상적 맥락과 발전의 길이다.
“공농무장의 할거와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고 궁극적으로 도시를 탈취하는” 이 길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다. 추수봉기가 실패한 후 창사(長沙)를 공략하지 못한 봉기군은 징강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후난(湖南)의 농민군대와 유학생, 소수의 우창(武昌) 국민경위단으로 구성된 봉기군은 역량이 미미해 이들이 후에 중국의 정권을 잡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중국 혁명의 길은 한 걸음 한 걸음씩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공산당은 먼저 정치적 독립을 실현했으며 궁극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담보한 것은 경제적인 독립이었다. 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의 뿌리는 광범한 지역에 설립된 혁명근거지에서 기원했다. 마오쩌둥이 개척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고 궁극적으로 도시를 탈취하는 이 길은 중국혁명을 위해 가장 주요한 기반을 닦았다.
1949년 새 중국을 창건한 후 마오쩌둥은 소련을 방문해서 스탈린과 만나자 첫 마디로 “나는 오랫동안 배척과 공격을 받아온 사람이라 말 할 곳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코민테른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중국 고유의 혁명의 길을 걸었으며 독립자주적인 이 길은 험난하고 굴곡적이었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이 말에 스탈린은 “승리자가 비난을 받지 않는 것은 일반적인 공리(公理)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중국공산당이 선택한 방침과 길, 정책이 정확함을 의미하고 코민테른의 과거 지도가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한 스탈린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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