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毛澤東)은 코민테른이 선정한 지도자가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장제스(蔣介石)도 쑨중산(孫中山)이 선정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의 홍색정권이 왜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명제를 해결했을 때 장제스도 사실상 전반 중국정권에 대한 국민당의 통제를 실현했다. 하지만 중국의 근대사에서 비범한 이 두 인물은 모두 그들의 이른바 상부로부터 지도자로 선정되지 못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쑨중산이 장제스를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알고 있고, 장제스도 늘 ‘총리의 유일한 후계자’로 자처하지만 사실 쑨중산은 임종을 앞두고 쑹칭링(宋慶齡)과 왕징웨이(汪精衛)의 이름만 부르고 장제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1925년 쑨중산 별세 후 설립된 중화민국 국민정부에서 장제스는 상무위원회 위원도, 국민정부 위원도, 국민당 중앙집행위 위원도 아니었고 심지어 후보위원도 아니었다.
쑨중산은 임종까지도 자신의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것이다.
장제스는 1905년에 쑨중산을 알게 되었으나 쑨중산은 장제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중용했고 그 중 천즁밍(陳炯明)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었다. 쑨중산은 장제스에게 의지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장제스에게 중요한 군사직무를 주지 않았다.
가장 먼저 장제스의 재능을 알아 본 사람은 천즁밍이다. 그는 장제스가 일반 참모진의 일원으로만 있을 인물이 아님을 알아보고 더 높은 직무를 주었다. 하지만 그 뒤에 천즁밍이 쿠데타를 꾸미자 장제스는 천즁밍과의 인연을 끊고 쑨중산의 편에 섰으며 그로 인해 쑨중산은 처음으로 장제스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쑨중산은 장제스에게 요직을 맡기지 않고 군사비서 정도의 직무만 위임했다.
쑨중산이 장제스에게 요직을 위임하지 않았는데 장제스는 어떻게 요직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소련인 고문이자 코민테른의 중국 대표인 보로딘에 있다. 장제스가 국민당의 요직에 오르고 역사무대에 올라 중국의 근대혁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한, 이 판도라 상자의 문을 연 사람은 바로 코민테른의 중국 수석대표 보로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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