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의 중국 수석 대표 보로딘은 공산당이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과 동시에 장제스(蔣介石)를 밀어주기로 작심했다.
보로딘은 중국에서 근무한 3년 동안 ‘국민당(國民黨)과 공산당(共産黨)간의 협력’을 ‘국민당과 소련간의 협력’으로 만들었으며 이런 협력을 쑨중산(孫中山)과 왕징웨이(汪精衛), 장제스 등 개인과의 협력으로 추진하는데 열중하며 중국공산당을 국민당과 흥정하는 카드로 사용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보로딘과 같은 거물급 인사의 지지가 있다 해도 장제스가 국민당의 막강한 인물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장제스의 앞에 거물 급의 노장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 군사부장 쉬충즈(許崇智)와 외교부장 후한민(胡漢民), 재정부장 랴오중카이(廖仲恺) 등 군권과 재정권, 정권을 장악한 세 사람은 장제스와 같은 인물이 넘을 수 있는 일반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몇 달 사이에 불가능한 일이 발생했다.
1925년 8월 20일 랴오중카이가 국민당 중앙본부에서 피살되었다. 쑨중산 별세 후 보로딘은 사실상 국민당의 실권을 장악해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결정은 국민당의 몇 몇 지도자가 내리지만 사실상 그 결정의 내면에는 보로딘이 있었다. 랴오중카이가 피살되지 국민당 원로들은 눈길을 보로딘에게 돌렸다. 랴오중카이 피살을 토론하는 회의에서 보로딘은 왕징웨이와 쉬충즈, 장제스 3인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정치와 군사, 경찰 권력을 위임하기로 하는 중요한 제의를 내놓았다. 보로딘의 제의는 사실상 결의였고 이 결의는 금방 채택되었다.
3인 중 국민정부 주석인 왕징웨이와 국민정부 군사부장인 쉬충즈는 세부적인 일은 하지 않는 터라 모든 일이 장제스에게 떨어졌다. 항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위기를 활용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장제스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황푸 사관학교의 힘을 움직여 쉬충즈의 저택을 포위하고 랴오중카이의 사건과 연관된다고 그를 비난했다. 변명할 여지도 없이 쉬충즈는 상하이로 도주했다.
자신의 앞길을 막는 첫 번째 큰 걸림돌을 제거한 장제스는 두 번째 걸림돌인 후한민(胡漢民)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후한민의 동생이 랴오중카이 사건에 연루된 것을 빌미로 후한민 일가를 구속, 심사했으며 후한민은 하는 수 없이 소련에 사절로 나갔다.
랴오중카이는 사망하고, 쉬충즈는 상하이로 쫓겨갔으며, 후한민은 소련으로 나갔다. 랴오중카이 사건 하나로 장제스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나서야 보로딘은 자신이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로딘이 장제스를 도와 정권을 탈취하게 하는 순간부터 보로딘은 과거처럼 장제스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보로딘은 장제스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랴오중카이를 땅에 묻고, 후한민과 쉬충즈를 쫓아낸 후 장제스의 앞에는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와 국민정부의 정치고문 보로딘, 그리고 마음 속으로 불구대천의 적으로 여기는 공산당 세 개의 장애물만 남았다.
그리고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을 통해 장제스는 중국공산당과 소련 고문단, 왕징웨이를 중점적으로 타격해 또 다시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중국 근대의 정객인 장제스의 수완이 대단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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