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이 논점을 가장 먼저 제출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먼저 총대로 중국의 정치에 개입한 사람은 위안스카이(袁世凱)이다. 청(淸)왕조는 위안스카이가 통제하기 힘든 신하임을 알고 그를 좌천시키려 했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로 다시 그를 불러 들여 신해혁명을 진압하게 했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신해혁명도 위안스카이를 받아들여 쑨중산(孫中山)은 임시 대통령직을 내놓고 위안스카이를 중화민국(中華民國) 초대 대통령으로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 위안스카이가 막강한 총대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중국혁명에 군사를 끌어들인 사람은 쑨중산이었고, 가장 먼저 중국의 정치에 총대를 끌어들인 사람은 위안스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총대의 역할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장제스(蔣介石)이다. 요언을 날조해 공산당인들을 체포, 감금하고 근로자들의 무장을 해제한 ‘중산함 사건’과 1927년 상하이(上海)에서 공산당과 국민당(國民黨)의 좌파, 혁명대중을 대거 학살한 ‘4,12반혁명정변’ 등 연이은 사태를 조성하며 공산당을 포위, 학살하는 과정을 거쳐 이름도 별로 없던 참모진의 한 사람으로부터 국민당의 당수가 되고 사관학교 총장과 국민당 위원장이 된 사람, 중국사회에서 손 꼽는 독재인물이 바로 총대를 숙련되게 활용한 장제스이다.
이로부터 중국의 혁명과 반혁명은 처음부터 다른 나라의 혁명과 반혁명과 달랐음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정치는 의회의 투쟁을 통하거나 공공연하게 변론하며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총대, 무력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장제스가 끊임없이 공산당과 반목하고 공산당인을 학살하면서 공산당은 총대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1927년 팔칠회의(八七會議)에서 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논점을 제출하기 까지 마오쩌둥(毛澤東)은 총대에 대한 인식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1919년 전에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 독재보다 무정부주의에 가까웠다. 1919년 5,4운동의 영향을 받은 후에도 마오쩌둥은 혁명을 호소하고 빵 혁명과 피를 흘리지 않는 혁명을 주장했다.
청년시기 피를 흘리지 않는 혁명을 주장하던 마오쩌둥 사상이 왜 이토록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장제스가 가르친 것이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 마오쩌둥은 혁명은 식사를 대접하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우아하고 태연자약하며 온화하고 공손한 것이 아니라 한 계급이 다른 한 계급을 전복시키는 폭력행동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혁명을 호소하고 피를 흘리지 않는 혁명을 주장하던 마오쩌둥이 폭력 혁명을 주장하고 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주장을 제출하기 까지 그 과정의 전환과 세례는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큰 대가를 지불하고 힘들게 얻은 소중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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