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21-06-23 11:13:43 출처:cri
편집:李仙玉

‘중산함 사건’

1925년 8월 랴오중카이(廖仲愷)가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사고였다. 장제스(蔣介石)는 이 사건을 이용해 국민당 내부에서 랴오중카이와 쉬충즈(許崇智), 후한민(胡漢民) 등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던 세 명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1926년 3월 ‘중산함(中山艦)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인위적인 사건이었다. 장제스는 이 사건을 이용해 또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장제스는 중산함 함장 리즈룽(李之龍)이 공산당인으로 자신을 납치하려 했으며 중국공산당과 소련 고문단, 왕징웨이(汪精衛)가 이 사건을 획책했다고 말했다.

당시 국민당은 소련 고문단의 중국 대표 보로딘에 의해 생기 발랄한 조직으로 발전 장대해졌고 보로딘은 국민당 내부에서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의 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기 전까지 보로딘의 파워가 필요했으며 시기를 기다렸다.

제2차 동정(東征)의 승전으로 장제스는 혁혁한 공을 쌓아 그 위망이 높아졌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출할 때 장제스는 249표의 유효 투표 중 248표를 얻었다. 제1차 대회에서 입장권도 받지 못한 장제스의 명성이 제2차 대회에서 최고에 이른 것이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을 빌미로 소련 고문단을 연금하고 보로딘의 권력을 무력화시켰으며 국민당의 핵심부서에 있던 공산당원을 모두 탈퇴시켰다. 공산당인이면 스스로 퇴출하거나 계속 남아 있을 경우에는 공산당에서 탈당해 국민당 당적을 가져야 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을 통해 소련과 공산당을 제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왕징웨이였다. 장제스로부터 ‘중산한 사건’의 기획자로 비난 받은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행동이 ‘모반’이라고 비난한 후 일체 방문을 사절했다. 그 때 왕징웨이가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지만 모든 군권은 장제스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1926년 4월초 왕징웨이는 진료를 핑계로 광저우(廣州)를 출발해 홍콩으로 갔으며 다시 마르세유로 가서 몸을 숨겼다.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중국공산당과 내통해 자신을 해외에 납치시키려고 ‘중산함 사건’을 기획했다고 비난했는데 왕징웨이는 스스로 알아서 해외에 나간 것이다. 이로부터 장제스가 국민당의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는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게 되었다.

(끝)

공유하기:
뉴스 더보기 >
기타 플랫폼
CMG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