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월 33살의 나이에 희생된 ‘비장군(飛將軍)’ 황궁뢰(黃公略)는 전기적인 삶을 살고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홍군(紅軍)의 장군이다.
한동안 장제스(將介石)는 홍군을 ‘주마오(朱毛)’홍군과 ‘펑황(彭黃)’홍군 두 갈래 세력으로 분류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주더(朱德)를 말하는 ‘주마오’ 홍군은 중앙 소비에트 구역과 장시(江西) 소비에트 구역에서 발전한 홍군을 말하고 펑더화이(彭德懷)와 황궁뢰를 말하는 ‘펑황’홍군은 핑장(平江) 봉기후 후난(湖南)에서 발전한 홍군을 말한다.
제1차 ‘포위 토벌’이 시작된 후 장제스는 마오쩌둥과 주더, 펑더화이, 황궁뢰 네 명에서 5만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그 만큼 당시 이 네 명의 홍군 지도자가 장제스에게 큰 위협이었던 것이다.
황궁뢰는 중국공산당 초기의 훌륭한 지도자이다. 마오쩌둥은 1930년에 쓴 시 <접련화ㆍ팅저우에서 창사로 향하다(蝶戀花ㆍ從汀州向長沙)>에서 “간수이(贑水)강의 저쪽 붉은 기슭, 사단 편성에 황궁뢰를 빌리네”라며 황궁뢰를 높이 평가했다. 황궁뢰는 마오쩌둥의 시에 나온 첫 홍군의 장군이다. 홍군 중에서 황궁뢰의 위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제1차 ‘포위 토벌’에서 황궁뢰는 홍3군(紅三軍)을 지휘해 정면에서 국민당의 제18사단을 저격하고 홍3군의 펑더화이와 홍4군(紅四軍)의 린뱌오(林彪)가 양면에서 협공해 18사단을 전멸시키고 제1차 ‘포위 토벌’을 격파했다.
제2차 ‘포위 토벌’에서 황궁뢰는 다시 한 번 큰 기여를 해서 적군의 제28사단과 제47사단을 전멸했으며 특히 하늘에서 내린 듯 갑자기 적군 앞에 나타나 빠르고 날렵한 행동으로 적군의 지휘부를 공격했다. 마오쩌둥은 황궁뢰의 이런 작전전략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비장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1931년 황궁뢰가 이동과정에 적기의 공습으로 33세를 일기로 희생되자 마오쩌둥은 몸소 황궁뢰의 추도회를 사회했고 “광저우 봉기에도 죽지 않고, 핑장 봉기에도 죽지 않았으나 오늘 희생되니 큰 화를 내린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혁명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유격전쟁에서도 공을 세우며 평생 용감하게 싸웠으니 그대 뒤를 이을 사람 많네”라는 추모의 글을 썼다.
마오쩌둥으로부터 이렇게 높은 평가와 정이 가득 담긴 평가를 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 한 정당의 최고 지도자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은 사람은 바로 중국공산당 초기에 아쉽게 희생된 지도자 황궁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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