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1-08-30 11:02:36 출처:cri
편집:朱正善

위구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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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족은 당(唐)나라 때 어얼훈하(鄂爾渾河)유역의 회 골(回鹘)에서 기원했다. 9세기 중반 회골칸국은 폭설이라는 자연재해와 통치계급 내부의 분쟁 그리고 외부의 제가스족의 침공을 받아 나라가 망했고 일부 주민들이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그중의 한갈래가 하서주랑의 사주(沙洲,현재의 둔황 敦煌), 감주(甘州 현재의 장예 張液), 양주(凉州 현재의 우웨이 武威)일대에 이주해 토번(吐蕃)정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역사상 이들을 하서회골(河西回鹘)이라 부른다. 851년에 사주의 한족인 장의조(張議潮)가 토번의 내란을 틈 타 사주의 여러 민족을 이끌고 봉기를 단행해 하서의 토번 장군을 몰아내고 과주(瓜州)와 사주, 이주(伊州), 숙주(肅州), 감주(甘州) 등 11주를 차지했으며 그후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때부터 하서의 회골은 장의조에게 귀순했으며 872년에 장의조가 죽게 된다. 그 후 하서회골은 감주성을 함락하고 칸을 추대하게 되는데 이런 연유로 하서회골을 감주회골이라고도 부른다. 875년 회골이 합라천(合羅川 현재 장예 서북부에 있는 어얼지나강)에서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바치며 이에 당나라는 비단 만필을 하사한다. 당시 당나라는 이미 국력이 많이 쇠잔한 상태였으나 조공사의 청을 받아 들여 많은 비단을 하사한 것인데 이는 쌍방간의 친선관계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10세기 이르러 토번의 세력이 약해지고 감주회골이 점차 강대해져 란주(蘭州)와 하주(河州)를 한층 통제하고 당나라와 서역간 교통통로를 통제했다. 후에 감주회골은 과주와 사주 등 주들의 한족 통치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때부터 과주와 사주 두개 주는 감주회골의 관할에 들어갔다.

감주회골은 정권을 세운 후 하서의 여러 회골부락을 통치했으며 최고 통치자는 칸이라 불렀고 한족의 관리제도를 사용해 재상과 추밀사(樞密使) 등 관직을 두었다. 칸이 통치하는 부락에는 따로 두령을 두지 않았다. 당시에는 과주와 사주회골, 양주회골, 하란산(賀蘭山)회골, 진주(秦州)회골, 합라천회골, 숙주회골 등 부락이 있었다.

하서회골은 중원의 왕조와 줄곧 긴밀한 연계를 맺어왔고 자신을 외조카의 나라로 여기면서 중원왕조를 외삼촌의 나라로 불렀다. 북송 때 감주회골의 칸은 여러번 사절단을 보내 현지의 특산물을 조공으로 바쳤고 이때 송나라는 “감주사주회골칸 외조카”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내지의 특산물을 선물로 주었다. 송태종(宋太宗) 태평흥국 5년(980년)과 송진종(宋眞宗) 대중상부 3년(1010년)에 감주회골의 칸은 여러번이나 고관을 송나라에 파견했고 명마와 산호 등을 공물로 바쳤다.

11세기 중반에 서하(西夏)와 하서회골간에 전쟁이 발발했고 서하는 감주를 함락, 감주회골은 결국 망하고 이때부터 하서회골은 서하에 복속되었으며 여러 부락은 가욕관(嘉峪關) 밖으로 이주해 방목에 종사하면서 여전히 송나라와 연계를 취했다. 송신종(宋神宗) 희녕 원년(기원 1068년)에 회골의 사신이 송나라에 와서 조공을 바쳤고 금장 “대반야경(大般若經)”를 구입하기를 청했다. 1073년에 회골의 사신은 회골 인구가 30여만에 달하고 그 중 장정이 20만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1227년 몽골군이 서하를 멸한후 하서회골도 몽골인들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11세기 중반부터 16세기까지는 위구족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오랜 역사과정에서 하서회골의 일부분이 주변의 몽골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한족 등 민족들과 장기적으로 살아오면서 상호 융합되었고 점차 하나의 공동체로 발전했다.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는 이들을 황두(黃頭)회골이라고 했고 “원사(元史)”에서는 싸리웨이우로, “명사(明史)”에서는 사로웨우르라고 불렀는데 바로 지금의 위구족의 조상인 셈이다. 현재의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신강(新疆) 위구르자치구 접경지역은 이들이 삶을 영위한 공동지역이다. 이 기간에 하서회골중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민족공동체에 융합되기도 했다.

원말명초에 가욕관밖에 살던 투루판, 하밀(哈密), 와라(瓦刺) 등 지방정권들이 서로 이익과 세력다툼을 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명나라는 관외의 안정(安定), 아단(阿端), 곡선(曲先), 사주, 한동(罕東) 등 지역에 군사성격을 띤 “위(衛)”를 세어 여러 민족을 통치했고 따라서 위구족도 “위”의 통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러 위가 다시 세력다툼을 하고 여기에 투루판정권과 몽골족 영주들의 침략으로 “위”는 연이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통치의 편리를 위해 관외에 설치했던 “위”조직을 관내에 이동시켰다. 위구족도 이때 관내로 들어왔으며 숙주부근과 감주 남산(南山)지역에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동부이주는 위구족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지금까지 위구족 민간에는 동부이주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몇백년전에 위구족의 고향이 강풍의 피해를 입어 가축이 날려가고 모래가 장막을 삼켰으며 황금으로 만든 불당도 모래산 밑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위구족 선조들이 다른 종교의 핍박으로 고향에서 살수 없어 동부이주를 시작했다 한다. “천불동(千佛洞)을 지나고 만불협(萬佛峽)을 가로 질러 주천성(酒泉城)에 장막을 쳤네. 산등성이 따라 아스라한 기련산(祁連山)에 오르니 드넓은 팔자돈(八字墩)목장이 보였다네. 아름다운 초원과 꽃향기 넘치는 팔자돈초원, 위구족의 살기 좋은 고향 되었다네.” 이들의 이 역사민가에서 동부이주의 노선과 경과를 대략 알수가 있다.    

위구족은 목축업을 위주로 해왔다. 역사적으로 5대(五代)의 여러 조대와 북송(北宋)정부가 필요로 하는 군마는 주로 회골에서 사들였다. 동부이주를 실현한 후 위구족은 경제생산방식에서 점차 변화를 보였다. 황니보(黃泥堡)일대의 위구족은 한족의 영향을 받아 농업생산기술을 익혔고 점차 농업으로 목축업을 대체했다.

명(明)나라 숭정 원년(1628년)에 현재 장예 서남부에 리원보(梨園堡)를 세우고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이는 위구인들을 통치하는 거점이었으며 이와 함께 위구족 대두령들에게 초원을 관할할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청(淸)나라 초반에는 어루터몽골즁갈부가 신강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감숙과 청해지역을 괴롭혔으며 이로 하여 기련산일대의 위구족은 즁갈부에 복속했다. 1696년(강희35년)에 청나라가 즁갈부의 몽골군 주력을 소멸했고 위구족은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중화민국 초기에 위구족지역은 감주진수사(鎭守使)와 숙주진수사의 관할에 들어갔다. 1931년 후에는 마부팡(馬步芳)의 청해군대가 하서주랑 중부와 서부를 통제했고 이때부터 위구족은 10년에 걸쳐 마씨군벌의 통치를 받았다. 1942년 이후 국민당의 하서 여러 현 정부가 위구족들이 살고 있는 곳들에서 호구조사를 하고 보갑(保甲)제도를 실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1959년 감숙과 청해 두 성은 기련산지역의 접경지대에 대한 대대적인 조정을 실시했다. 이때 감숙 관할이던 팔자돈과 우애(友愛)가 청해성 기련현에 소속되었고 이 곳의 위구족은 감숙성 소속으로 변한 황성탄(현재의 황성진)으로 “천리 대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는 청나라 이후 위구족의 분포양상을 바꾼 또 한차례 중대한 변화였고 위구족은 더 많고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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