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1-19 14:50:10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1월 18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1월의 두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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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인 18일은 양력 한해 가운데서 322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두 달에 미치지 못한 43일이 남았습니다.

이번 주 역사상의 이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요일인 17일은 ‘국제 대학생의 날’입니다. ‘국제 대학생의 날’은 또 ‘세계 대학생의 날’, ‘국제 학생의 날’이라고 불립니다.

1946년, 세계 여러 나라 학생 대표가 프라하에서 전 세계 학생대회를 소집하고 해마다 11월 17일을 ‘세계대학생의 날’로 정했으며 이로써 전 세계 대학생들의 단합과 친선을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명절의 설립은 또 폭도의 피비린 죄악 행위를 공소하고 반파시즘 대학생운동을 기념했으며 대학생들이 평화와 민주, 자유, 진보를 창도하고 추구하는 것을 기념하는데 취지를 두었습니다.

금요일인 19일은 모나코의 국경일입니다. 모나코는 유럽의 프랑스 남동부 지중해에 잇닿은 나라인데요, 국경선의 길이가 총 4.4km로 면적은 매우 작지만 국경일과 국기, 모네가스크(Monegasque)라고 하는 모나코어 방언을 가진 독립국입니다. 세계적으로 바티칸시국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나라입니다.

19일은 또 세계 화장실의 날입니다.

2001년, 30여개 나라와 지역의 5백여명 대표가 싱가폴에서 제1회 화장실 정상 회의를 가졌습니다. 고상하고 우아한 자리에 나올 수 없었던 화장실이 이때 세계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핀란드, 영국, 미국, 중국, 인도, 일본, 한국, 호주, 말레이시아 등 나라의 대표가 제1회 화장실 정상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는 해마다 11월 19일을 세계 화장실의 날로 정했습니다. 이어 제67회 유엔총회는 2013년 7월 24일 결의를 채택하고 해마다 11월 19일은 ‘세계 화장실의 날’로 설립했으며 이로써 안전한 식수와 기본 보건시설의 건설을 추진하고 사람마다 청결하며 편하고 위생적인 환경을 향유할 것을 창도했습니다.

세계 화장실의 날은 여러 나라 정부가 행동하여 환경위생을 개선하고 위생 습관을 기를 것을 격려했습니다. 이 행동은 콜레라, 장내 기생충, 이질, 폐염, 설사, 피부감염 등 사람을 쇠약하게 하거나 심지어 숨지게 하는 질병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세계 화장실의 날 활동은 여러 나라의 정부와 시민들에게 화장실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또 여러 나라 해당 부문에서 조치를 취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도록 추진했습니다.

[간주]

2.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이 시간에는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의 옛 마을 조선인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섯 신을 섬긴 본계의 박씨

요녕성(遼寧省) 본계(本溪)는 청(淸)나라 옹정(雍正) 12년(1734)에 시내 북쪽의 작은 호수로 생긴 이름이다. 호수가 서우(犀牛)의 뿔 모양 같다고 해서 서호(犀湖)라고 불리다가 본계라고 작명했다고 한다.

박씨의 세조(世祖)는 지명보다도 훨씬 먼저 본계에 자리를 잡았다고 박명욱(朴明煜, 1952년 출생)이 밝히고 있었다. 그 동네가 현성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고 박씨가 세운 마을이라고 해서 박보(朴堡)라고 불린다고 했다.

문자기록으로 박씨의 세조가 처음 세간에 등장하는 것은 1625년경이다. 후금(後金) 천명(天命) 10년(1625),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한 손자가 본계에 말뚝을 박고 장원(莊園)을 설립한다. 이 손자가 훗날 경근(敬謹) 친왕으로 된 인물이다. 이때 흥경(興京)에서 양홍기(鑲紅旗)와 친왕의 장원에 보낸 장정(壯丁) 가운데는 박보 박씨의 세조가 된 박응강(朴應强, 맏이)과 박영권(朴英卷, 셋째), 박영영(朴英榮, 넷째), 박응원(朴應元, 다섯째) 형제 4명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웬 일인지 둘째 박응조(朴應祖)는 친왕의 소작농과 토지 명부에 등장하지 않는다. 박응조가 전쟁 난리판에서 사망했거나 어디론가 실종되었을까… 실제로 후금은 포로들을 왕공귀족의 포의(包衣, 노복)로 파견했는데, 그 시기 흥경에는 조선과의 전쟁으로 갑자기 조선인이 대량 출현하고 있었다.

1619년, 사르후(薩爾滸) 전투에서 후금에 대항하던 명(明)나라와 조선의 군대는 크게 패했다. 미구에 포로병들은 후금의 도읍인 흥경에 압송되었다. 참고로 사르후 전투는 명나라에 쳐들어오는 후금에 대항하기 위한 명나라의 전투이다. 조선은 명나라를 지원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는 명나라와 후금의 전략적인 결전이었으며 승전한 후금이 뒤이어 만주 지역을 차지했다. 조선군은 전패 후 파병된 1만 3천여 명의 대부분이 전사했으며 기타 5천여 명은 후금에 항복했다. 박씨의 세조가 포로였다면 그 전장은 이 사르후 전투일 가능성을 쉽게 점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이나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과 포로를 연결시키지만, 후금(청)이 조선을 침입한 이 전쟁은 본계에 친왕의 장원이 나타난 후 비로소 생긴 사건이다.

우리 일행이 박명욱을 만났을 때 박씨의 후손은 제16대에 이르고 있었다. 한 세대를 25년으로 계산하는 관습에 따르더라도 박씨의 가계는 옛 명부의 기록과 일치하며 모두 400년의 세월을 잇고 있는 것이다. 맏이 박응강에게 아들이 있어서 가계를 이었다면 박씨의 후손은 제17대나 제18대에 이르며 가계의 역사는 더 길어진다. 본계 박씨의 세계(世系)는 대륙에서 17세기가 아니라 이보다 더 이른 16세기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세조가 전투에서 포로로 된 박씨일지 아니면 세조 자체가 요동(遼東)에 살던 박씨의 후손일지를 누구도 모른다. 세조의 흔적이 묘연하여 고증할 길 없다고 박씨의 선인(先人)들은 족보를 만들면서 한탄하고 있었다.

[간 주]

[계속하여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 여섯 신을 섬긴 본계의 박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씨의 세조가 후손에게 남긴 것은 항렬의 돌림자 10자이다.

본계 박씨의 가문에 확실한 기억으로 유존되는 선인은 제5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때 박씨의 이름은 구전이 아닌 명문(銘文)으로 확실하게 등장하고 있었다. 건륭(乾隆, 1736~1796) 연간 본계 현성에 있던 영녕사의 종(鐘)에 지명 박가복(朴家卜)과 인명 박자본(朴自本)이 명문으로 나타났다. 박자본 등 마을의 유지인사가 사찰의 기부자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박가복(朴家卜)은 광서(光緖, 1875~1908) 연간에 박가보자(朴家堡子)로 개칭했고 민국(民國, 1912~1949) 연간에 이름을 줄여서 박보로 되었다. 이런 중국말의 지명에 앞서 옹정(雍正, 1722~1733) 연간의 옛 공문에는 다른 지명을 적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박보는 또 만족말로 심산의 골짜기라는 의미의 ‘합리마화라(哈蜊螞火羅)’라고 불리고 있었다.

박자본은 스스로의 자(自)를 항렬의 돌림자로 쓰고 있으니, 분명히 본계 박씨 가족의 제5대 인물이다. 항렬 돌림자의 10자가 박씨의 가족에 대대로 전승되면서 비로소 밝힐 수 있는 많지 않는 내용의 일부이다.

어찌됐거나 본계 박씨의 족보에는 본관이 적혀 있지 않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박씨는 314본이나 되지만, 본계 박씨에 문자나 구전으로 전하는 본관이 없다. 오직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순수한 혈족으로 이어온 성씨라는 그 하나만 판정할 수 있을 뿐이다. 기어이 그 무슨 본관이라고 한다면 본계가 그들의 본관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본계에 나타난 박씨의 세조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고 있을까…

현지의 만족과 한족 박씨는 옛날부터 그들을 ‘고려가 뿌린 씨앗’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1988년 박보 지역을 답사했던 연변의 사학자들은 《중국조선족이주사 논문집(1989)》에 이 방문기록을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박씨의 선인들은 일찍 고려의 구리 그릇과 숟가락, 대야 등을 사용했으며 이런 토기를 발굴한 적 있었다고 한다. 박보 박씨들의 조선족 족명(族名)을 회복할 데 대한 공사(公社, 향)의 청시보고에도 박보에 고려의 토기 등이 잔존한다고 적고 있다.

현지의 박씨는 만주 8기(八旗)의 양홍기로 되고 있었지만 농업 합작화(合作化, 1949~1953) 전후에 거개 한족으로 족명(族名)을 바꿨다고 한다. 박씨가 조선인 후예라는 것이 인정되면서 1984년 본계현 정부는 박보의 박씨가 조선족으로 족명을 바꾸는데 동의했다. 부근의 산성자(山城子)의 박씨도 조선족으로 족명을 회복했다.

그러나 청나라 말과 민국(民國, 1912~1949) 초년을 선후하여 길림성(吉林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에 각기 이주, 박씨 마을을 형성했던 본계 박씨의 후손은 종국적으로 그냥 한족으로 되고 있다.

만족이든 한족이든 아니면 조선족이든 적지 않은 박씨에게는 다만 신분증명서에 덧붙인 하나의 이름에 불과했다. 박보의 좌장으로 되는 박문붕은 그의 족명에 별다른 흥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박문붕의 아내 장씨도 1961년에 결혼을 할 때 신랑을 만족인줄로 알았다고 한다. 그즈음인 1964년 첫 전국인구전면조사를 할 때 본계 지역 조선족 인구는 12,938명이었다고《본계시지(本溪市志)》가 밝한다. 물론 이때 본계 토박이의 박씨는 조선족 인구 숫자에 아직 포함하지 않고 있었다. 박씨들이 조선족으로 족명을 바꾼 1985년 본계 지역의 조선족 인구는 무려 13,068명에 이르렀다. 본계현은 1964년 그때 조선족이 단 305명에 불과했으나 1985년에는 8,005명으로 급증했다.

네, 반도의 고유한 성씨라고 하는 박씨는 중국에도 있으며 또 만족, 한족, 조선족 등 족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섯 신을 섬긴 본계의 박씨 이야기었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한반도의 상징적인 성씨인 박씨는 오래전부터 중국 대륙에 등장하는데요, 역사서인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나라 환관 박모모는 원(元)나라의 도읍인 대도(大都, 북경)에 나타납니다.

원나라 역사에 기재된 이 환관 박모모의 이름은 무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원나라 역사에 기재된 이 환관 박모모의 이름은 무얼까요?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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