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룡
삼복중의 중복이다.
해가 중천에 떠서 불볕을 쏟는다. 꽃이파리를 흔드는 한올의 바람조차 없다. 옷을 죄다 벗어내치고 팬티바람으로 집안에 앉아있어도 온몸이 땀벌창이 된다. 무더위다. 사람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무서운 더위다.
갑자기 눈이 생각난다. 마음속에 눈을 떠올리니 시원한 기류가 가슴에 흘러드는듯싶다. 무더위속에 눈을 생각하는것도 삶의 조미료일가.
나는 눈도 추운 날에 세찬 바람에 휘몰리며 사람의 얼굴을 때리는 그런 못된 눈은 싫다. 바람 한점 없는 날 소리없이 소복이 내리쌓이는 그런 안온한 눈이 그립다. 나는 어릴적에 그런 눈이 내리는 날이면 앞마당에 새덫을 놓고 언제 새들이 덫속의 낟알을 찾아 날아들겠는가고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베실을 무릎에 대고 비비면서 넉두리를 하셨다.
"눈이 이렇게 자꾸 와서 네 아부지(아버지)는 산판에서 어떻게 목재실이를 하는지 걱정이구나!"
나는 눈이 와서 새잡이에 가슴이 흥분으로 활랑거리는데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상이 걱정스러워 한숨을 토한다. 이것이 부부의 짙은 정인줄 어린 내가 어이 알수 있었으랴! 생활이란 이렇듯 모순적이다.
초급중학교 2학년때의 설이였다. 연길에서 사업하는 사촌형이 우리 집으로 설 쇠러 왔다. 사촌형은 내가 여직까지 도시구경을 못해본 알짜촌놈이라는것을 알고 측은히 생각되였던지 이번 걸음에 연길에 데리고 가서 도시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너무 좋아 밤잠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다. 눈은 하루밤 내내 내리고도 그칠념을 하지 않고 온 하루 줄곧 퍼부었다. 눈이 내리면 시골은 차길이 막혀 사람들은 구새먹은 통나무안에서 동면하는 곰과 같이 문밖에 나서지 못한다. 사촌형은 휴일이 막 끝나는지라 돌아가지 못해 안달이였고 나는 연길구경이 수포로 돌아갈가봐 끙끙 속앓이를 했다. 며칠이 지나도 차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촌형은 120리를 걸어서 현성에 가 기차를 타려고 나섰다. 나도 부모의 만류도 불구하고 형을 따라나섰다. 무릎을 치는 눈길을 헤치며 걷기란 정말 힘에 부쳤다. 그래서 첫날은 겨우 70리를 걷고 중도의 마을에 들려 하루밤을 쉬였다. 이튿날 깨여나니 다리가 천근 되는듯 무겁고 아팠다. 아직도 올리막길 이십리 내리막길 이십리나 되는 큰 령을 넘어야 했다. 나는 형을 따라나선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되돌아갈수 없었다. 나는 형이 걱정할가봐 아프다는 말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내처 걸었다. 난생처음 눈길에서 개고생했다. 겨우 연길에 도착했으나 나는 그만 지쳐 쓰러지다보니 도시구경 별반 못하고 돌아오게 되였다. 그러나 그번 걸음에 작은 도시지만 도시란 어떤 모양인가를 알게 되였고 열다섯살을 먹고 처음 한족사람도 보았다.
마차를 몰고 다니며 변소의 분변을 치는 사람이였는데 그에게 구운 기름떡을 주면서 어떻게 먹나 보니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뱅뱅 돌아가며 뜯어먹고 버리는것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사람이란 다 사는 방법이 있구나 생각했다. 시골놈인 나는 얼마간 시야를 넓혔다.
안해가 바깥에 나갔다가 아이스크림 몇개 사들고 왔다. 나는 한대 게 눈감추듯했다. 속은 시원했으나 몸에서는 의연히 땀이 물흐르듯했다. 날씨가 너무 더우니 글쓰기도 책읽기도 싫다.
눈길에 나를 찾아왔던 첫사랑의 처녀가 생각난다. 그해 겨울 아버지가 산판에서 나무를 패다 눈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자 내가 대신 산판에 가서 일했다. 그때 그 처녀가 산판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그녀는 새물새물 웃는 새별 같은 눈으로 무언의 정을 쏟았다. 그날 밤 우리는 하얀 달빛이 비추는 수림속의 오솔길을 걸으며 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눈보라에 수림이 우는 소리와 부엉이 우는 소리가 음악인양 들려왔다.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앞날에 대하여 오래오래 이야기했다. 그때 발밑에서 뽀드득뽀드득하던 감미로운 소리가 지금도 귀전에 들리는듯하다. 이튿날아침 그녀는 돌아가야 했다. 뻐스가 통하지 않는 산길이라 나는 그녀를 트럭에 앉혀보냈다. 추운 겨울날에 그녀를 하늘이 보이는 적재함에 태워보내는 나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그래서 산판에서 작업하는 빨간 솜장갑을 그녀의 손에 끼워주었다. 트럭은 울퉁불퉁한 눈길로 덜커덕거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나는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나의 빨간 장갑을 끼고 떠나간 처녀는 다시는 나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말았다.
내가 평생 눈과 맺은 인연이 어찌 이뿐이랴! 눈이 허리를 치는 산속에 들어가 땔나무를 하느라 보름씩이나 고생하던 일이 지금도 꿈에 자주 나타나 몸서리친다. 나는 눈속에서 겪던 가지가지 슬픈 일, 가슴 아팠던 일들에 대해 회억하기 싫다. 그런데 오늘 이 무더위속에서 왜 눈이 그리울가? 아마 흘러간 세월이 약이 되여 추억의 감미로움이 눈과 맺은 인연을 봄풀로 가슴에 돋쳐주나싶다.
올해겨울에도 눈은 내릴것이다. 이제는 눈과 함께 아름다운 이야기를 엮어야겠다. 눈속에 피는 매화꽃 같은 이야기를…
해가 서쪽하늘에 노을을 펼치며 지기 시작한다. 땅에서 끓던 열기가 식고 훈훈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녁식사하자는 안해의 부름에 나는 사색에서 깨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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