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균 선
인생은 유감이다. 많은것이 기억되고 또 많은것이 잊혀지고…그래서 한스럽기도 한 우리네 삶이다. 찬란한 해빛과 령롱한 이슬보다는 궂은비 내리는 날이 더 많은 법이라 기억의 보따리에 마음 짓눌려 일어설수도 분발할수도 전진할수도 없는 경우가 많거니 그 시고 쓰고 매운것을 짓씹어야 하는 고충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그럴때 망각제일주의자들이 설교한다. 망각술을 터득하라. 누군가 당신을 해쳤던 기억도 사람들의 비방도 벗의 배반도 잊으라. 언젠가 치솟은 분노도 증오도 치욕의 순간도 잊으라. 기억은 늘 추억의 꽃을 심어놓지만 망각의 언덕에 이르면 색바래고 시들기마련이다. 잊어야 할것은 빨리, 그리고 깨끗이 잊으라.
"잔들어 수심을 달래려하니 수심은 더욱 깊어지고 칼을 들어 물을 베니 물은 더구나 줄기차더라", 아픈 기억의 늪에서 헤여나지 못하면 약자이고 그보다 슬픈 일이 없으리. 긴긴 밤 가위에 눌리지 말고 힘껏 태질하라. 악몽에서 깨여나면 의연히 맑은 새 아침, 태양은 예이제 눈부시고 작은 풀잎에 진주이슬 아롱지리라. 굳어져버린 과거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오늘마저 잃어버릴수 있다.
망각은 단순히 기억의 말살이 아니다. 망각은 일종의 떨침이고 어젯날 자신과의 겨룸이고 의지의 련마이기도 하다. 모든 고통을 잊는 령단묘약은 세월이라 하지만 기실 망각의 공로이다. 망각은 도전자만이 가질수 있는 기백이고 비장한 결의로서 인생고와 우수에 대한 오연한 무시이고 조소이다.
그러면 생활의 주재자로 될것이요 더욱 자신있게 새롭게 도전할수 있을것이여니 망각술을 배우라. 기억이 지겨워지면 힘겨울뿐이다. 속절없는 기억의 노예에게는 오직 자학의 채찍뿐이다. 잊으라!침묵이 금이라지만 망각도 금이다. 그대 망각을 앞세우면 희망의 새 언덕에 훨훨 날아오를수 있다. 그리고 또……
이렇듯 기억은 표상저장에 일심불란인데 망각은 늘 "잊어보세타령"이다. 망각의 심연속에 묻혔던 표상들이 때로 회억의 덕에 재생되기도 하지만 보다 많은것이 일단 망각에 묻혀버리면 다시 불귀가 되고만다.
망각이 정말 만사대길인가? 아니다. 지어먹은 망각이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에 속할뿐이다. 과거는 이미 우리들의 의식의 통제밖에 있는 세월의 언덕 저편에 굳어진 실재이다. 우리 능력으로 어찌해 볼수 없는것은 표상안의 과거이다. 세월의 류수가 기억의 언덕을 씻어내려 형성된 자연적망각의 퇴적은 가능하지만 이른바 기억의 청산(淸算)이란 심리조작이다. 과거로부터 형성된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임의대로 무찔러버린다는것은 자기모순이 아닐수 없다. 흔히 잊어버리고 싶다는것은 기실 잘 잊혀지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아픈 과거를 망각의 언덕에 파묻으려 할수록 봄싹처럼 돋아날수 있다.
기억에는 력사적인것도 있고 은사권에 속한것도 있다. 력사적이고 공유된 기억은 인류문화보물고의 고지기다. 개체생명으로 말할 때 아무런 기억도 없는 대뇌는 텅빈 창고와 같다. 당신이 실로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의 이름마저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까맣게 잊고 있을것이다.
이는 확실히 재미있는 심리숨박곡질이다. 만약 당신이 인류력사상의 그 파란만장했던 도경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미군들의 폭격에 무고한 팔루자시민들이 당한 참상도 레바논의 페허로 된 도시도 기억하지 못했을것이며 자유평화의 "구세군들"이 비인간적으로 포로를 학대하는 만행들도 기억하지 못했을것이다.
망각에 자족하는 사람들의 사상은 샘물과 같아서 영원히 맑게 흐를것이요 해마다 올해가 더 의미있다고 느낄것이다. 한것은 본질상 대동소이한 지난해가 이미 그들의 대뇌에서 모호해졌기때문이다. 기억력이 차한 사람들은 생활은 영원히 의의롭다고 느낄것이며 밝아오는 새 아침처럼 청신하다고 말할것이다. 이것은 생활의 잠규칙인지 반드시 껴안아야 할 행복의 일종인지 모르겠다.
환득환실이라는 인생유희규칙으로 볼때 기억과 망각에 들어맞으며 더 유익하다고 말할수 있겠다. 오지 않으면 가지 않을것이요 새겨두지 않으면 모호해질 일도 결코 없을것이다. 그러나 현대 우리 겨레들에게는 기억이 너무 생생한것이 문제가 아니라 집체무의식의 병페가 너무 홀가분하게 망각의 품에서 자족하는것이 문제이다.
너무 멀리 간 기억을 불러올것도 없다. 36년간 일제의 군화에 짓밟힌 망국노의 원한도 세강대국 수뇌자의 악랄한 롱간질로 빚어진 민족분단의 시말도 악명이 자자한 일제731부대의 생체해부 등 악마의 향연도 망각의 좀먹은 도포자락에 감싸여 영영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단말인가?
력사에 대해 두가지 관점이 있을수 있다. 전자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던 력사로서 늘 상기해야 두뇌가 명석해지고 교훈을 섭취할수 있다고 한다. 후자는 이미 과거 로 굳어져버린것으로서 잊어버려야 사상보따리를 벗어던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 기계를 잘 돌릴수 있다고 한다. 지금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은 피의 력사도 호랑이 담배피운던 얘기를 하듯 담소속에서 흘려버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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