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매란방(梅蘭芳)은 한개 시대의 부호로만 여겨질 수 있다. 교과서를 통해 매란방은 근세 경극의 4대 명배우 중의 한명으로서 중국 경극의 대표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뿐 당시 그의 하늘을 찌를듯한 인기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매란방을 연예계의 공전절후한 왕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1. 금괴 10개의 출연료, 노임은 모택동의 5배
매란방이 처음으로 상해 연출을 갔을때 극장측은 며칠간 당지 신문면을 사들여 "매란방" 세 글자만 연속 출판시켜 상당수 관중들의 이목을 끌었다. 상해에서의 그번 연출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뒤로 매란방의 출연료는 금괴 10개에 상당했다고 한다.
해방후 부자가 사라진 중국, 당시 최고 노임을 받는 사람이 바로 매란방이었다. 50년대 모택동의 노임은 408.8원(인민폐), 매란방은 자유직업자인만큼 출연료가 순 수입이었는데 1956년 매란방이 주동적으로 월급을 낮춘 후의 노임이 2100원(인민폐)에 이르렀다. 당시 청화대학의 교수는 매달 식사비 8원(인민폐)으로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었다는 상황에 대비해 매란방의 노임 2100원은 어떤 개념인지 가히 가늠할 수 있다. 때문에 항미원조때 대포도 아닌 비행기를 직접 기증할 수 있었다는 매란방의 경제력이 더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무대위에서의 매란방(좌)
2. 할리우드 진출의 제1인
1929년, 미국의 초청을 받고 매란방은 연극단을 거느리고 미국 할리우드 공연을 나갔다. 당시 미국에서는 오페라, 화극, 잡극 등이 성행했는데 이에 대비해 매란방이 연출한 중국경극은 대사, 노래, 연기 등 예술수법을 결합시켜 미국에서 한차례 대진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 매란방은 "남자가 여자역을 맡은" 중국 예술특색을 살려 광범위한 미국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3.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국제적 명성
1956년, 중일 수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하에서 매란방은 중국 방일 경극단을 이끌고 또 한차례의 "매열풍"을 일으켰다. 방일기간 일본 저명한 배우와 각계 인사들은 매란방 일행을 열정껏 접대했으며 일본 국회의원은 양국 수교가 건립되지 않은 상황하에서 처음으로 의회청사에서 대표단을 초대했다.
10월혁명 40주년이 되는 1957년, 중국에서는 노동자 우호대표단을 조직해 모스크바의 성대한 기념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매란방도 팀원 중의 한명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매란방은 역시 한차례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대표단이 초청에 의해 극장에서 관람하게 되었는데 주최자측에서 귀빈 "매란방"을 소개할때 극장내는 떠나갈듯한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4. 국가상장, 중국에서 수여
1957년 여름, 스웨덴무용협회 주석은 국제무용협회 위탁을 받고 특별히 베이징에 다녀와 매란방에게 영예상장을 수여했다. 매란방은 이 영예를 획득한 제 14번째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