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
어느 유명한 소솔가가 그랬다지요. "소설은 왜 쓰게 되었어요?"하고 물으니 "심심해서"라고. 심심하다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또 있을까요? 심심하다는 것은 누군가하고 어울리기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느낌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처럼 지나가는 시간들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하는 안타까움, 결국은 그런 순간들을 혼자서 견뎌야 한다는 자각의 출발점이 아닐까요. 그래서 심심하다고 하면 우리들의 삶이 본래 지니고 있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옵니다. 저는 소설이, 아니 문학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독자를 심심함으로부터 구제하는 일이라고 언제부턴가 생각해 왔습니다.
심심하다는 말을 떠올리면 꼭 제 아들 얘길 하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온 날 저녁, 유치원 다니던 녀석이 베개를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찾아갔습니다. 할아버지가 "너 왜 안 자고 이방으로 왔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가 "할아버지 심심하잖아"라고 대답했대요. 그 날부터 큰 집으로 이사와 자기 방이 생길 때까지 약 5년간, 녀석은 할아버지와 함께 방을 썼습니다.
그 녀석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저의 아버지는 손자가 건넨 그 말을 너무나 고마워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 아들이 ''심심''하다고 한 표현이 아버지의 맘을 감동시킨 것은 상황을 단지 잘 ''서술''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상심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도 걸핏하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궁색한 인사밖에 생각해내지 못하는 제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의 슬픔, 아픔, 외로움 등을 꼭 집어 어루만질 줄 알았던 제 어린 아들보다 더 못난 제 자신을 깨닫습니다.
저는 그래서 때로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똑똑한 문학인보다는 무식한 포장마차 주인이 이 시대를 더 잘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입에 발린 수십 권의 글보다는 한 줄의 글에 담긴 따뜻한 마음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심심한 독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서는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을 쓸 수 없으리라는 당연한 결론을 내려봅니다.
어려운 때라고들 얘기합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희망이 없는 땅이라고도 말합니다. 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문학이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어오기도 하지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책이 서점에 넘칩니다. 컴퓨터의 빠른 정보와 현란한 동화상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과연 문학의 위기인 것 같습니다.
저는 문학이 심심한 당신을 위해 옷을 벗고 몸을 팔아서 이 위기를 넘겨야 한다는 얘길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일시적 쾌감이란 단지 심심함을 잠시 잊게 해주는 최면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당신 또한 잘 알고 계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제가 그 동안 해온 작업들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었나,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심심한 당신을 더욱 심심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구요.
어떤 일본 사람이 쓴 한국인 비판을 보면서 무척 화가 났던 일이 생각납니다. 애정이 없는 비판이란 결국 자기 잘난 척 하는 짓에 불과하지요. 너희들은 왜 그렇게 못났니. 난 이렇게 잘났으니 노력하면 나처럼 되기는 힘들더라도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지. 너희들은 참 무식하구나. 이렇게 고상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가진 세계로 들어오너라.... 그 따위 글들을 제가 쓰고 있지나 않았나 염려스럽습니다.
칼럼을 쓰다보니 제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의 글, 스스로를 완벽한 사람인 양 착각해서 남을 가르치려 하는 글을 나도 모르게 자꾸 쓰게 됩니다. 남을 배려하고 따뜻한 가슴 한 조각이라도 나눌 수 있는 글을 써야하는데 말입니다. 당신의 심심함을 덜어주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다시 또 지루하고 쓰잘 데 없는 얘길 늘어놓았군요. 용서해 주세요.
당신과 함께 우리 마음에 봄을 기다리면서…
LA에서 김동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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