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 계열소설상 수상작(2000년)
김훈
우리 집에 와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북경에 왔던 장모님이 한해를 조금 넘기고는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집 생활형편 때문이나 자식들의 효도가 문제시 되여 떠나간 건 아니였다. 우리 집 생활형편을 보면 그래도 북경에서는 중등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내외 둘다 로임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고정직업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부수입으로 생기는 돈도 적지않아 부자들처럼 돈을 펑펑 쓰지는 못해도 쓸만한 일엔 주저없이 돈을 내밀 수 있을 정도로 저금도 있다. 집도 세칸짜리 아파트를 마련했고 승용차 한대도 굴리고있다. 딸애도 장모님을 무척 따랐고 우리 내외도 효도에 게을리함이 없었다. 그런데 장모님은 북경은 자기가 살 곳이 못된다고 하면서 끝내는 떠나가셨다. 북경에 오시기전에는 살아생전에 북경에서 한번 살아보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던 장모님이 북경에서 한해를 살아보고 살 곳이 아니라고 떠난데는 그 리유가 있을 것이다. 그 리유중 하나가 북경이 장모님에게 준 이미지였을것이다.
지난해 가을에 장모님은 북경에 오셨다. 마침 북경의 자연경관에서 가장 절경이라는 향산의 단풍축제가 한창이였다. 장모님을 모시고 향산으로 가는 길에 나는 향산의 단풍이 어떻게 절경인가를 침이 마르도록 소개했다.
《향산의 단풍은 말이죠. 말 그대로 그림입니다. 하늘과 숲을 빨갛게 물들이는 향산의 단풍은 그야말로 절경이지요. 도시공간에서 살다가 향산에 가면 이런 별천지도 있나 하고 누구나 감탄을 뽑게 됩니다. 이제 장모님도 그런 느낌이 들겁니다.》
그러나 향산은 장모님에게 그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장모님은 언짢은 기분이였다. 장모님이 받은 향산의 인상은 이러했다.
《산속이라는게 새소리 하나 들을 수 없고 사람들만 바글거리니 눈이 다 어질어질해 나네. 저것도 다 단풍잎인가, 죄다 벌레 먹어 구멍이 숭숭한게 어느 하나 성한게 있나.》
과연 그랬다. 노랗게 빨갛게 물든 단풍잎은 죄다 구멍이 숭숭했고 산속엔 사람들이 부르고 찾는 소리만 들릴뿐 새소리 하나 없었다. 81년에 북경영화학원에서 공부할 때 찾은 향산은 그렇지 않았다. 숲이 우거진 향산은 새들의 서식지로 으뜸이였고 단풍은 단연 절경에서도 첫손에 꼽힐만 했다. 그런데 지금의 향산은 왜 이 모양일가? 궁금해서 나는 산을 내려오다가 관리원인듯한 사람에게 그 영문을 물었다. 그 대답이 기막혔다.
《맞지요. 이전엔 향산은 새들의 서식지로는 가장 좋은 곳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몇년동안 새벽마다 신체단련하려고 조깅삼아 산을 찾는 사람들이 산에 와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새들을 죄다 쫓아보냈습니다. 벌레를 잡아먹던 새들이 인간들의 고함소리에 놀라 보금자리를 내주니 향산은 벌레들의 천국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단풍잎이 죄다 저 모양이지요.》
벌레들의 천적인 새가 인간들에 의해 쫓겨나자 나무나 나뭇잎을 갈아먹는 벌레들이 향산의 주인으로 군림했다는 얘기다. 숲을 지키고 인간들에게 귀맛좋은 노래를 들려주던 새들이 쫓겨가니 이제는 향산은 인간과 벌레가 공존하는 세계로 되여버렸다. 그 보응으로 인간들은 하는수없이 하늘과 숲을 빨갛게 물들이던 단풍잎보다는 벌레먹은 단풍잎만 멀거니 쳐다보는 신세가 돼버렸다.
《그래도 단풍은 우리 사는 곳의 단풍이 제일이지.》
북경의 절경이라는 향산에 와서 장모님은 고향의 단풍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모님을 모시고 향산행을 택한 그날의 관광은 억망이 되었다.
장모님한테 준 북경의 첫이미지는 말이 아니였다. 그런데 그 뒤로 장모님은 물론 우리들까지도 경악할 일이 생겼다. 아침에 우리 내외는 차로 딸애를 선무구에 있는 학교까지 실어다준다. 우리 집이 있는 석경산구역에서 선무구까지는 거리가 거의 20여키로메터가 되기에 차가 밀리는 출근전에 미리 서둘러 떠나야 한다. 보통 우리는 아침 6시반이면 집에서 떠난다. 그날 장모님은 외손녀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따라나섰다. 때는 12월이라 아침 6시반이라도 어둑어둑했다. 차가 장안거리 연장선인 서장안거리를 한참 달려 공주분(公主墳)에 거이 이르렀을 때 날은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공주분 립체교를 천여메터 앞두고 앞차가 접촉사고를 내는바람에 우리 차는 잠깐 멈춰섰다. 차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장모님이 놀란 소리로 물어왔다.
《이보게 저게 뭐요?》
장모님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길 량쪽에 늘어선 건물 옥상에 설치된 광고판우에 시커먼 새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까마귀였다. 그것도 한두마리도 아니고 무리였다. 나는 내눈을 의심했다. 다시 눈을 비비고 봐도 역시 까마귀였다. 까마귀가 옛적부터 사람들한테 불길한 새로 인정받아왔고 까마귀소리는 불길한 징조를 예고하는 청승맞은 소리로 간주되여 온것만은 사실이다. 우화 창작의 시조로 불리는 이솝의 우화에서도 까마귀만은 좋은 형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솝우화에서 나오는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 제목만 봐도 그렇다. 례들면 《욕심을 부린 까마귀》, 《두번이나 덫에 걸린 까마귀》, 《먹이에 목숨까지 건 까마귀》, 《벌거숭이가 된 까마귀》 등 제목으로 된 우화에서 까마귀는 미련하고 징그러우며 다욕스럽고 허영심이 많은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실 까마귀는 익조에 속한다. 까마귀는 썩은것을 먹기좋아해서 대자연의 《청소부》로 불리는 보호받아야할 조류의 하나다. 그런데 아무리 《청소부》라고 불리는 익조라고 해도 수도의 중심가에 떼지어 서식하고 청승맞게 울어대며 수도 상공을 날아다닌다는것은 그 누가 봐도 기분좋게 보아질 경관이 아니다. 언제부터 까마귀가 수도 중심가에 모여들었는지 또 왜 모여들게 됐는지 나로선 알수가 없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장모님이 주셨다.
《북경엔 까마귀 먹이가 많은 모양이군.》
《까마귀 먹이?》
《까마귄 원체 썩은것을 좋아하니까.》
장모님의 말대로 한다면 북경엔 까마귀가 좋아하는 썩은 것이 많다는 얘기다. 우리 내외는 또 한번 장모님앞에서 수도시민으로서 얼굴을 붉혔다. 그날 《북경석간》을 들춰보니 마침 《까마귀가 수도상공에서 울어대는것은 수도에 쓰레기가 많기 때문이다》란 제목으로 된 글이 실렸다. 글은 이렇게 적고 있었다.
《12월부터 어둠이 깃들 때면 장안거리나 왕부정거리, 동단과 서단 등 수도의 중심가에서 떼지어 날아 다니는 까마귀를 볼수 있다. 수도의 중심가에서 그것도 비둘기가 자유롭게 날아예야 할 곳에서 한두마리도 아니고 수만마리나 되는 까마귀떼가 날아다닌다는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또 까마귀소리를 듣는다는것이 섬?하기도 하다.
비록 까마귀가 익조라고 해도 산성이 강한 까마귀의 분변은 도시 건축물의 목조구조와 건축물 표면을 부식시키기에 도시에서 살 조류가 아니다.
수도의 중심가에 왜서 갑자기 까마귀떼가 나타났는가에 대해 조류전문가들은 북경의 로천에 방치된 쓰레기가 까마귀떼를 불러들인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북경 중심가만 벗어나 골목에 들어가면 도처에 방치된 쓰레기를 어렵잖게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곳곳에 자리잡은 남새시장, 아침시장에 내버려진 쓰레기와 쓰레기처리장에서 채 처리되지 못하고 로천에 방치된 쓰레기가 까마귀떼를 불러들인것이다.
수도인 북경은 까마귀에 대해 축객령을 내려야 한다. 그렇다고 대약진때처럼 전민이 동원되여 소리소리를 질러 모든 조류들로하여금 깃들 자리가 없어 날다가 떨어져 죽는 그런 미련한 조류와의 전쟁은 다시는 벌리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이런저런 수단을 써서 잠시 까마귀를 쫓아 낼수 있다고는 하지만 도시 곳곳에 쓰레기가 방치되여 있으면 까마귀는 또다시 날아들것이다. 그보다는 인간은 조류의 생존환경을 파괴하지 말고 조류에게 마땅한 서식지를 마련해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생존환경을 쓰레기로 얼룩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수도에서 까마귀를 몰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다.》
글을 보니 수도시민들이 까마귀를 축출하는 《전쟁》을 벌이지 않고는 안될 상황이였다. 수도의 중심가에 까마귀가 몰려든것으로하여 많은 정치유머까지 나왔다. 항간에는 이런 말까지 나돌았다.
《까마귀가 왜 수도에 모여들었는지 아나? 쓰레기를 주어먹으려는것보다도 수도에 부정부패를 일삼는 자들이 많다는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자고 날아든거야.》
《썩은것을 청소하는 까마귀같이 부정부패를 쓸어내는 까마귀같은 〈청소부〉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면 좋겠구만.》
《까마귀를 쫓느라고 로천에 방치된 쓰레기를 청소하기에 앞서 인간 〈쓰레기〉들을 먼저 척결해야 한다니까.》
좌우간 수도 중심가에서 서식하고 있는 까마귀는 북경의 이미지를 한껏 흐리게 했다.
우리 집에서 몇 달을 보낸 장모님은 갑갑해서 더는 못있겠다고 했다. 우리 내외가 출근하고 딸애가 학교에 가면 장모님은 종일 텔레비죤앞에 붙어앉아 있었다. 한어도 모르는 장모님은 그저 언뜻언뜻 지나가는 화면만 바라볼뿐이였다. 연변같으면 그래도 조선말로 방송되는 라지오방송과 텔레비죤방송이 있어 종일 가도 심심한줄 모른단다. 집에 있다가 밖에 나가면 서로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조선족 로인들이 있고 또 이곳저곳 다닐 친척들도 있는데 북경은 집에 있으나 나가나 상대할 사람이 없단다. 집에 있으면 자기 그림자와 마주하고 나가도 따라다니는건 역시 자기 그림자뿐이란다. 나이 칠십인 장모님의 심심풀이로 제공해줄것이라곤 장모님이 즐겨듣는 《흘러간 옛노래》 테프나 혹간 인편으로 전해온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제작한 《노래자랑》이나 《소품묶음》같은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하루에 열댓번씩 보고나면 나중엔 싫증이 난단다. 한어를 모르니 로인들 모임에 나가보라고 권할수도 없었다.
하루는 장모님이 나에게 불쑥 이렇게 물었다.
《여긴 참 이상하네. 왜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나?》
《여기 사람들은 각별한 사이나 급한 일이 아니면 집으로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웃간이나 친구사이에 서로 다니겠는데.》
《여긴 십여년을 살면서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절에도 그렇나?》
《연변처럼 명절이라고 서로 찾아다닌다거나 이웃간에 색다른 음식같을걸 나누는 일이 거이 없습니다.》
《살 곳이 아니군그래. 사람사는 집에 사람이 나들어야 사람사는 집같지. 모진 세상이군그래…》
장모님은 리해가 안간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집엔 그래도 사람이 나들어야 하네.》
장모님이 나한테 주는 충고였다. 장모님의 충고대로 나는 자주 친구들이나 후배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장모님은 대단히 기뻐하셨다. 한마디로 장모님은 이제야 사람사는 집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허구헌날 매일같이 손님을 불러들일수는 없었다.
장모님은 새벽이면 일어나 머리를 깨끗이 빗고 운동삼아 아침시장으로 나간다. 기실 채소거리는 안해가 퇴근하면서 사가지고 오기에 아침시장에 나가 살 필요가 없지만 어데 갈곳이 없는 장모님은 매일 아침시장을 돌아보고는 무우나 배추, 파같은걸 조금씩 사들고 들어온다.
한어도 모르면서 어떻게 무우나 배추같은걸 흥정해 사는가고 하면 그 정도 한어는 할수 있다고 한다. 한어수준이라야 기껏해서 《저거(이것) 둬챈(몇전)?》, 《노배(무우) 이진(한근) 지모(몇십전)?》 정도다. 장사군들은 그래도 장모님의 한어수준을 인정해준단다. 한번은 맥주잔을 몇 개 사들고 들어왔다. 안해가 집에 맥주잔이 많은데 왜 샀는가고 하니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난 맥주를 무척 즐긴다) 집에 맥주잔이 많아야 한단다. 얼마주고 샀느냐 하니 1원씩 달라고 하는걸 반시간동안 흥정해서 깎고 깎아 하나에 70전씩 주었다고 하면서 기분나 했다. 장모님이 장사군들과 값을 흥정까지 했다니 더 희한하다.
그날 장모님은 식탁에 마주앉아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시장갔다가 오면서 보니 여기 집들은 죄다 감옥같더구만.》
《네? 감옥?》
《여기 집들은 모두 환하게 잘도 지어놨더구만 창문이라고 생긴덴 죄다 쇠살창을 댔더군.》
《도적을 막느라고 댄겁니다.》
《도적을 막느라고 자기마저 갇아놓은 셈이 아닌가. 혹시 불이나면 하나밖에 없는 출입문으로 나갈수 없게되면 어쩌겠나. 그저 갇히워 타죽고 마는수밖에 없잖나.》
장모님의 말씀에 도리가 있다. 지난해 심수와 광주에서 화재가 났는데 타죽은 사람 대부분이 자기 집 창문에 댄 쇠살창 때문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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