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구이야기 오늘은 이 일망타진이란 성구의 유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망타진, 一网打尽--一 한 일자, 罔 그물 망자, 打 칠 타자, 盡 다할 진자로 이루어졌습니다.
북송 4대 황제인 인종때의 일입니다.
당시 북방에는 거란족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중국의 일부였던 안남(安南)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인종황제는 연약 외교로 일관했습니다.
전한(前漢) 5대 황제인 문제와 더불어 어진 임금으로 이름난 인종황제는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문치를 폄으로써 이른바 '경력의 치'로 불리우는 군주정치의 모범적 성세를 이룩했습니다.
이때의 역사적인 명신으로는 한기, 범중엄, 구양수, 사마광,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조의(朝議)를 같이 하다보니 명론탁설(名論卓說)이 연달아 나왔고 따라서 충돌도 잦아졌습니다. 결국 조신이 두 파벌로 나뉘어 교대로 정권을 잡게 되자 20년동안에 내각이 17번이나 바뀌게 되었습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단명 내각의 시대를 가리켜 '경력의 당의'라 일컫고 있습니다.
이 무렵,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두연(杜衍)이 재상으로 되었습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황제가 상신들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조서를 내리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내강(內降)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두연은 이 같은 관행은 옳바른 정치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것이라 하여 내강이 있어도 이를 묵살하고, 보류했다가 10여통쯤 쌓이면 그대로 황제에게 되돌려보내군 했습니다. 이러한 두연의 소행은 성지를 함부로 굽히는 것이라 하여 조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때 공교롭게도 관직에 있는 두연의 사위인 소순흠이 공금을 유용하는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평소 두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어사 왕공진은 쾌재를 부르고 소순흠을 엄히 문초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공범으로 몰아 잡아 가둔 뒤, 재상 두연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범인들을 '일망타진'했나이다."
일망타진이란 성구는 바로 이렇게 유래된 것입니다. 이 성구는 범인들이나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잡는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유명한 두연도 재임 70일만에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성구이야기 오늘은 일망타진이란 성구의 유래를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