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2-03 20:34:02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2월 2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2월의 첫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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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목요일은 2일은 양력으로 올해의 336일째 되는 날입니다. 어느덧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29일 남았습니다.

이번 주 역사상의 이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2월 2일은 노예제를 폐지한 국제의 날입니다.

1949년 12월 2일, 유엔 총회는 이날 제317호 결의를 채택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성매매 착취를 금지할 데 대한 유엔 공약’을 통과했습니다.

1986년부터 12월 2일은 노예제를 폐지한 국제일로 되었습니다. 이밖에 2002년 12월 18일 유엔 총회를 결의를 채택하고 2002년을 노예제 반대와 철폐 투쟁을 기념하기 위한 국제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12월 2일은 중국 교통안전의 날입니다.

2012년, 중국 공안부는 국무원에 “12월 2일을 ‘전국 교통안전의 날’로 설립할데 대한 청시‘를 회부했습니다. 2012년 11월 18일, 국무원은 2012년부터 해마다 12월 2일을 ’전국 교통안전의 날‘로 설립하는 것을 비준했습니다.

2018년 11월 15일, 공안부, 중앙문명판공실, 교육부, 사법부, 교통운수부, 응급관리부 등은 통지문을 이날부터 12월말일까지 ‘전국 교통안전의 날’ 주제 활동을 조직, 전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21년 4월 3일, 공안부 사이트식에 따르면 공안부는 도로교통법 수정안에 대해 2021년 4월 23일까지 의견을 공개 모집했습니다. 이 수정안은 교육 기능을 두드러지게 하고 해마다 12월 2일을 ‘전국 교통안전의 날’로 분명히 했습니다.

 1986년 12월 2일,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8차 회의가 ‘기업파산법 시행’을 통과했습니다.

이에 앞서 1986년 8월 3일, 요녕성 심양시 방폭기계공장이 파산을 선포했습니다. 이 공장은 개혁과 개방을 실시한 후 파산을 선포한 첫 국영기업입니다.

 2011년 12월 2일, 중국 곡물 소출이 8년 연속 성장했습니다.

2011년 12월 2일, 국가통계국은 2011년 전국 곡물 총 소출이 2010년보다 2473만톤 늘어난 약 5조 7100여톤에 달한다고 밝혔습니다. 사상 곡물소출 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2020년 곡물 생산능력의 기획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해 중국 곡물 소출은 8년 연속 성장을 이뤘습니다.

 12월 3일은 대만의 빈랑 해로움을 막는 날입니다.

이날은 1997년 대만당국이 특별히 제정한 날입니다. 대만 민중들에게 더는 빈랑을 씹지 말게 하려는데서 기인되었습니다. 빈랑을 씹는 문화는 구강암 환자가 늘어나게 했으며 환경오염 등 대만 특유의 많은 사회문제를 낳았습니다.

빈랑나무는 열대에서 자라는 섬유질이 풍부한 과실입니다. 빈랑을 씹으면 정신이 든다고 합니다. 최초에는 밤차를 달리는 화물차 기사와 대만 남부의 체력 노동자들이 빈랑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갈수록 많은 젊은이들이 빈랑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대만 18세 이하 학생들의 빈랑 씹기 습관을 조사한데 따르면 빈랑을 씹은 적 있는 남성 고중생이 7.5%에 달하며 남성 초중생은 12%에 달합니다. 여성 고중생과 초중생은 각기 1%였습니다.

2. 중국 대륙의 조선인 옛 마을

이 시간에는 ‘대륙의 옛 마을 조선인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삼태성 발로 밟은 철령의 이씨 장군

명(明)나라의 장령 이성량(李成梁)은 남다른 명을 타고 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삼태성’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하게 드러난다. 발을 씻겨주던 시종이 그의 발바닥에 붉은 점이 세 개 박혀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정말로 ‘삼태성(三台星)’을 발로 밟은 하늘의 무신(武神)이었을까… 이성량은 벼슬이 요동(遼東)의 총병(總兵)이요, 작위가 봉백(封伯)에 이르고 있었다. 무공이 하도 높아 명나라 2백 년 동안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태성’을 발견한 시종에게 느닷없이 액운이 떨어진다. 그가 무심코 땅바닥에 흘린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시종의 발바닥에도 붉은 점이 있고 7개나 된다는 것이다.

발바닥에 붉은 점이 7개가 있다니… 전설에 따르면 ‘북두칠성’을 밟고 있는 건 천자(天子)의 운이 아니던가. 예언을 늦게야 읽은 이성량은 미래의 이 천자를 죽여 버리려고 작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시종은 야음을 타서 도망했다. 미구에 그는 기진해서 숲에서 정신을 잃는데, 추격군이 숲에 불을 질렀다. 시종을 따라온 개가 개울에서 물을 묻힌 후 주인의 주위를 굴러 불을 껐다. 시종이 깨어났을 때 개는 죽고 추격군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까마귀들이 날아와서 몸을 덮었으며, 이로 하여 시종은 추격군에 발각되지 않았다. 개와 까마귀가 훗날 만족에게 영물의 대상으로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전한다.

정말로 ‘북두칠성을’을 발로 밟은 지상의 천자이었을까… 추격군에 벗어난 이 시종은 나중에 건주(建州) 여진(女眞)의 수령으로 되며, 종국적으로 동북 여진의 각 부락을 통일하고 나라 후금(後金)을 세운다. 청(淸)나라의 초대 황제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소설 같은 옛 이야기이다.

인터뷰를 했던 이택면(李澤綿, 1961년 출생)은 ‘붉은 점’의 이야기가 단지 민간에 유전하는 전설일 뿐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막사에 있던 가정(家丁, 종)이라는 건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성량과 누르하치의 악연도 실제로 있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성량은 원래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해 누르하치를 인질로 두고 있었다고 한다. 누르하치의 외조부는 물론 조부와 부친 모두 지휘사(指揮使) 등 건주 여진의 부족 두목이었다.

‘이성량과 그 가족’의 이야기에 중뿔나게 누르하치를 거드는 것 같다. 누르하치로 하여 ‘이성량과 그 가족’에게 나중에 액운이 떨어진다고 하면 대충 이해가 될 것 같다.

이처럼 ‘이성량과 그 가족’을 이택면이 유달리 숙지하는 사연이 있다. 이택면은 이성량 가족의 시집 등 다수의 전문 서적과 극본을 집필, 출판한 작가이다. 그는 또 요녕성(遼寧省)사학회의 회원이고 그 보다 또 이성량의 14대손이다.

요녕성 북부의 철령(鐵嶺) 시내에서 이택면을 찾아 만났다. 이성량의 후손들은 철령 동쪽의 소툰(小屯)에서 이씨의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었다. 철령은 ‘쇠의 고개’라는 이름처럼 금성철벽이라는 의미이다.

소툰은 그 시기인 당(唐)나라 때의 지명이라는 이택면의 설명이다.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동정(東征)을 하면서 당나라 군대가 둔병(屯兵)을 하던 이곳에 작은 동네가 생겼다고 한다. 종당에는 둔병을 하던 군인은 사라지고 마을의 천 년 전의 옛 이름만 댕그랗게 남았다는 것이다.

이름이 작은 동네이지 실은 큰 마을이다. 소툰에는 현재 2천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은 이성량의 이씨 성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이성량의 항렬부터 20자의 돌림자를 전하고 있었다. 이 항렬 돌림자는 이미 열일곱 번째 세수(世數)의 올릴 거(擧)자에 이르렀으며, 이를 위해 이씨들은 20년 전에 또 돌림자 10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즈음에 이씨 가족은 그들을 주도로 하는 ‘이성량연구회’를 발족, 이택면은 이 연구회의 부회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택면은 이성량의 후손들이 소툰에서 지키던 것은 옛 산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의 이씨는 선조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고조 이영(李英)부터 4대 선인(先人)들의 무덤은 모두 여기에 있었다.

4대 선인들은 새 무덤의 마을이라는 의미의 신분촌(新墳村)에 가족무덤을 두고 있었다. 신분촌은 소툰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지난 10리 밖의 마을이다.

이영의 5대손인 이성량 그리고 이성량의 아들 이여송(李如松), 이여백(李如柏)의 무덤은 따로 소툰 부근의 산기슭에 있었다. 이성량 등의 무덤은 신분툰과 분간하기 위해 오랜 무덤이라는 의미의 노분(老墳)이라고 불린다. 무덤산은 용의 모양이며 이성량은 바로 용두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성량의 후손들도 사후 이곳에 무덤을 쓰는데, 화장을 한 후 안장한다고 한다. 무덤의 동서 방향 신도(神道)에는 돌사자, 돌양, 돌말, 돌사람 등 석상(石像)이 있었다. 요녕성의 북쪽 지역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명나라의 무덤 앞 석상 작품이다. 소툰의 노분은 시신이 없는 의관총(衣冠塚)이며, 이성량과 이여송의 진실한 무덤은 베이징의 어느 곳엔가 있다고 전한다.

누르하치의 원수로 되었으니, 선산의 뫼가 그대로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1619년, 누르하치가 철령을 공략한 후 이씨의 가족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영의 둘째 손자 이춘무(李春茂)의 일파(一派)는 10남 6녀가 피살되었다. 이성량이 거처인 철령의 망화루(望花樓)도 이때 훼손되었다고 한다. 망화루는 문의 윗부분에 매화 모양의 기석(奇石)을 넣은 명소이다. 1644년 북경이 함락된 후 이여송의 손자 이준조(李遵祖) 등 이성량의 후손은 여전히 순난(殉難)의 겁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툰에 살던 이씨들은 현성 철령이나 서울 베이징에 살고 있던 이성량의 기타 자식들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지만, 선조의 무덤가에서 백성의 평범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누르하치가 천하를 빼앗기 위해 이씨 등 명문벌족의 영향력을 이용, 이성량의 가족에게 귀부(歸附)를 회유하며 관작을 내린 건 그 후의 이야기이다.

이쯤하면 아무래도 이성량의 가계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성량의) 고조 이영은 조선으로부터 내부(內附)하였으며 대대로 철령위(鐵嶺衛)의 지휘첨사(指揮僉事)로 임명을 받아 마침내 거기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고 《명사․이성량전(明史․李成梁傳)》이 기술하고 있다.

강희 판본의 《이씨계보(李氏譜系)》는 소툰의 이씨 가문에 대대로 전승되었다. 괴뢰 만주국(滿洲國, 1932~1945) 시기 진본의 한부는 일본에 유실되었고 일부는 대륙의 동란 시기에 소실되었으며 철령과 소툰에 각기 한부 잔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이씨계보(李氏譜系)》를 판독했던 사학자 소노다 카즈키(園田一龜)는 소화(昭和) 13년(1940) 《동양학보(東洋學報)》에 글을 게재하고 이씨가 여진인의 혈통일 가능성을 내놓았다.

다섯 선조의 이름이 중국인이나 조선인과 같지 않고 오히려 여진인과 더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름은 물론이고 지리나 역사적 특성을 보아도 압록강의 오른쪽 기슭에서 살던 여진인이라는 것이다. 이택면은 한발 더 나아가 이영의 선조가 조선에서 살던 여진인의 두목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씨의 선조 이름에서 나오는 바투(把圖)는 여진어로 장군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무게의 추는 이택면이 주장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듯 했다. 1993년 철령현의 어느 촌락에서 이씨 가문의 초본(抄本) 족보가 발견되었다. 강희 판본의 《이씨계보》보다 이른 족보였다. 이 족보에 따르면 이영은 이응니(鷹你, 膺尼와 같은 의미)의 아들이며 천호(千戶, 무관직무)를 세습했다. 이 무렵 또 이영의 장손이자 이성량의 조부인 이춘미(李春美)의 무덤이 신분촌에서 도굴되었다. 이때 발견된 가정(嘉靖) 34년(1555)의 묘지명은 선조 이응니가 도강하여 철령에서 살았다고 기술한다. 또 선적(先籍)은 조선국의 독로강(禿魯江)이라고 밝혔다. 독로강은 장자강(將子江)의 옛 지명으로 강계를 흘러지나 압록강과 합류한다. 고려는 일찍 강계에 여진의 촌락이라는 의미의 만호포(滿戶浦)를 설립하고 군대를 배치했다. 이영의 선조가 지역민으로 군이나 지방의 장관을 담임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뒷이야기이지만, 이에 반론을 제기한 연변의 언어학자가 있었다. 옛날에는 이성계(李成桂)도 한때 여진인의 말로 이름을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한 조선의 제1대 왕이다. 한때 이성계는 여진인의 말로 ‘어린이 장군’이라는 의미의 ‘아지바토(阿智巴托)’로 불렸다고 어사(語史)가 기록한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咸鏡道) 영흥(永興)은 고려 말까지 여진인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여진인의 말로 작명하고 또 여진인이 살던 지역에 있었다고 해서 꼭 여진인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실제로 고조 이영의 이름은 성주(星州) 이씨 등의 옛 족보에 나타난다.

아무튼 족보나 사서의 기록은 모두 이씨의 선조가 조선에서 도강했다는데 이의가 없는 것 같다. 이성량의 아들 이여송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나라 원군을 인솔하여 조선에 파병되는데, 이때 조선의 군신에게 그의 선조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던 사정을 여러 번이나 언급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여송은 또 그의 선조가 독로강(獨魯江, 禿魯江과 같은 뜻)의 사람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正祖)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한 이여송 등 명나라 장수들을 선무사(宣撫祠)와 무열사(武烈祠)에 모시며 또 이여송의 후손 이원(李源)을 관리로 발탁했다. 와중에 이여송의 후손 가운데 일부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 조선으로 이주하여 농서(隴西, 중국 대륙의 동북부에 위치) 이씨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농서 이씨는 성주 이씨와 뿌리를 같이한다.

기실 이택면이 말하고 있는 그들의 종파(宗派) 이름도 이씨의 본관이라고 하는 성주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성량의 후손이라고 하거나 철령 이씨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현존하는 이씨의 본관은 100본 정도이며 대륙에서 밝혀진 이씨의 종파는 5천 개 정도 된다. 이씨는 세계적으로 단일 성씨의 제일 많은 인구수를 자랑한다. 그럴지라도 철령 이씨는 한국의 이씨 세계(世系)에 존재하지 않으며 중국의 이씨 종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성량의 후손들은 반도나 대륙이나 할 것 없이 특이한 이씨를 새롭게 열고 있는 것이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먼저 지난달의 퀴즈답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반도의 상징적인 성씨인 박씨는 오래전부터 중국 대륙에 등장하는데요, 역사서인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나라 환관 박모모는 원(元)나라의 도읍인 대도(大都, 북경)에 나타납니다.

원나라 역사에 기재된 이 환관 박모모의 이름은 무얼까요?

네, 역사서인 《원사(元史)》에 따르면 원나라의 도읍 대도에 나타난 환관의 이름은 박불화(朴不花) 라고 합니다.

계속하여 성씨와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반도의 고유한 성씨라고 하는 박씨는 중국에도 있으며 또 여러 족명 즉 여러 민족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러면 박씨는 중국에서 어떤 족명으로 되어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반도의 고유한 성씨라고 하는 박씨는 중국에서 어떤 족명 즉 어떤 민족의 이름으로 되어 있겠습니까.

네,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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