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1 09:13:08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촌-86] 융리: 군사목적의 보루동네

(사진설명: 아름다운 융리촌)

중국의 고촌(古村) 시리즈 중 여든 여섯 번째는 군사목적의 보루동네 융리(隆里, Longli)촌이다. 세월이 흘러 융리는 어젯날 군사보루로서의 위엄은 잃었지만 융리 옛 성 어디서나 볼수 있는 거리와 건물, 다리와 우물, 사당과 무덤 등으로 토템과 종교, 역사와 현실이 함께 하는 역사문화의 활화석으로 부상했다.

융리촌은 원래 용리(龍里)로 불리웠는데 높고 성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융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당(唐)나라때 조성된 융리는 명(明)나라때에 이르러 인근에서 중요한 군사적 보루로 되었다.

600여년의 풍상고초속에서도 완정하게 보전된 융리는 중국 남방에서 가장 잘 보전된 옛 성의 하나로 인정된다. 성안에는 또 도가대원(陶家大院)과 과갑제(科甲第), 무거제(武擧第), 왕씨종사(王氏宗祠) 등 가옥들이 완정하게 남아 있고 성밖에는 왕창령사(王昌齡祠)와 장원교(狀元橋), 장원묘 등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사진설명: 융리옛성의 일각)

1359년에 축조된 융리옛성은 명나라때 남방을 벌하기 위해 북쪽의 군사를 집결하던 곳이다. 따라서 성안의 길목마다에 관문을 세우고 담에는 감시용 망루를 세웠다.

둘레 1500m, 높이 4m, 너비 3m에 달하는 성에는 허와 실을 가릴수 없게 네 개의 성문을 두었고 이름도 각각이다. 동문은 재문(財門), 남문은 희문(喜門), 서문은 수문(水門), 북문은 귀문(鬼門)이다. 따라서 결혼할때는 반드시 동문을 통과하지 북문을 통과하지 않는다.

융리성안에 들어서면 이 곳의 거리가 다른 곳과 달리 모두 정(丁)자모양의 삼거리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정자 모양의 삼거리는 융리의 번창을 대표한다고 한다.

(사진설명: 융리옛성의 건물)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기한 융리옛성의 건물은 지금보다도 앞서가는 합리한 구도를 자랑한다. 성안에는 72개의 성을 가진 가문이 살아가고 우물도 72개가 있다.

1594년에 지은 장원교는 이 곳에 정배 온 당나라때 시인 왕창령(王昌齡)을 기념하기 위한 다리이다. 왕창령이 과거시험에 일등으로 급제한적이 있기 때문에 융리인들은 그를 장원으로 불렀고 그를 기념하기 위한 다리도 장원교라 했다.

전한데 의하면 왕창령은 시를 잘못 써서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융리의 용표위(龍標尉)로 좌천되었다. 융리에 온 왕창령은 계속해서 많은 시를 썼고 “용표서원(龍標書院)”을 세워 글도 가르치면서 많은 인재를 키웠다.

(사진설명: 융리옛성의 일각)

청나라때 지은 도가대원은 융리성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완정하게 보전된 가옥이다. 사면에 키 높은 방화용 외벽을 쌓고 정원을 둘러싸고 건물을 지었으며 청석을 깐 정원의 한쪽에는 정교한 용을 새긴 돌로 된 독을 두고 다른 한쪽에는 “광하화거(廣廈華居)”라는 글을 새긴 커다란 액자를 걸었다.

융리의 전통문화는 유구한 역사를 보유하면서 다채로움을 자랑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희(漢戱)라는 이름의 연극과 이야기 하기, 용등놀이등 세 가지이다.

정원 대보름날의 용춤은 융리의 사육제로 불릴만큼 명절의 크라이막스를 이룬다. 이 날이 되면 용춤을 추고 탈춤에서 기원한 탈을 쓴 용을 가장한 사람들이 연극을 펼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융리촌)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탈을 쓴 어리광대역은 춤을 추면서 길바닥의 진흙을 관중의 얼굴이나 몸에 바른다. 그 바람에 관객들이 그를 피해서 사처로 도망을 치는데 그 진흙이 묻은 사람은 그 해 한해동안 좋은 운이 따른다고 해서 도망은 치되 마음은 즐겁다고 한다.

융리에는 훈제생선과 추석에 먹는 중양주(重陽酒), 미화(米花)나 마엽(麻葉)으로 불리우는 다양한 떡, 기름에 튀긴 고추 등 다양한 먹거리가 있는데 맛이 특이해서 한번 맛 보면 그 맛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위치: 귀주(貴州, Guizhou)성 검동남(黔東南, Qiandongnan)시 금병(錦屛, Jinping)현 융리(隆里, Longli)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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