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군의 장군들 중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시 홍군을 위해 큰 기여를 하고 당시 공농홍군(工農紅軍)의 기둥이었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젊은 생명을 바친, 잊지 말아야 하는 청년 장군들이 적지 않다.
쉰화이저우(尋淮洲),
22살 나던 해인 1933년에 홍7군(紅七軍) 군단장을 맡은 쉰화이저우는 홍군에서 가장 젊은 군단장이였다. 청년학생의 신분으로 추수(秋收) 봉기에 참가했다가 징강산(井岡山)에 오른 쉰화이저우는 사관학교를 나오지 않았지만 전쟁 속에서 빨리 진보하며 혁혁한 군공을 쌓아 19살에 사단장이 되고 22살에 군단장이 되었다.
혁명의 전쟁 속에서 성장한 우수한 청년 군사 지휘관인 쉰화이저우는 성품이 소박하고 용감하게 싸우며 기지를 잘 발휘했다.
후에 쉰화이저우의 홍7군은 팡즈민(方志敏)의 홍10군과 함께 홍10군단으로 재편되었으며 홍10군의 정치위원은 팡즈민이 맡고 군단장은 원 홍10군의 군단장 류처우시(劉疇西)가 맡았으며 쉰화이저우는 홍10군단 산하의 세 사단 중 하나인 제19사의 사단장을 맡았다.
쉰화이저우는 1934년 탄쟈차오(譚家橋) 전역에서 희생되었다.
류처우시(劉疇西),
1922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류처우시는 황푸(黃埔) 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이며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5.4운동에 참가했고 쑨중산(孫中山)의 경호원을 지냈으며 제1차 동정에서 왼팔을 잃으며 장제스(將介石)가 기반을 닦는데 기여했고 난창(南昌) 봉기에 참가했으며 이어 소련으로 가서 모스크바 프룬제 군사학교에 입학했다.
황푸 사관학교 1기 졸업생이고 소련 군사학교 경력까지 갖춘 류처우시는 당시의 홍군에서 줘취안(左權)을 제외하면 비견할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류처우시가 전역의 지휘에서는 자주 실수를 보여 탄쟈차오 전역을 잘못 지휘했고 그바람에 쉰화이저우를 비롯한 많은 장군을 잃었다.
탄쟈차오 전역에서 실패한 류처우시는 전략적 이동 과정에 우유부단한 지휘로 화이위산(懷玉山)에서 적시적으로 포위를 뚫지 못하고 1935년 1월말 팡즈민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장제스는 많은 사람을 보내 류처우시의 항복을 권했지만 류처우시는 끝까지 머리를 숙이지 않고 팡즈민과 함께 희생되었다.
후톈타오(胡天桃),
후텐타오는 화이위산에서 희생된 홍10군단 제21사단의 사단장이다. 화이위산 전역을 지휘한 국민당의 장군은 왕야오우(王耀武)였다. 오래 동안 홍군과 대결해온 왕야오우는 홍군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토록 강한 전투력을 보이는지 알려고 포로가 된 후텐타오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왕야오우: “국민당이 제국주의와 결탁했다는 근거가 있는가?”
후텐타오: “국민당이 군대를 가지고도 항일하지 않고 내전을 벌이며 제국주의 장교를 고문으로까지 임용하는데 이 것이 제국주의와 결탁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왕야오우: “공산주의는 중국의 국정에 맞지 않음으로 중국에서 실패로 끝날 것이다.’
후텐타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만이 가장 좋은 사회이다. 나는 공산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왕야오우: “당신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당신의 가족을 보호할 수 있다.’
후텐타오: “나는 집도 가족도 없다. 보호할 필요가 없다. 나를 죽여라.”
왕야오우는 그 담화에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고 후텐타오는 형장에서 희생됐다.
화이위산전역에서 포위를 뚫고 나온 홍10군단의 군대는 군단의 참모장 쑤위(栗裕)가 이끈 제21사단 제5중대 뿐이었지만 이 혁명의 불씨는 금방 넓은 벌판을 태워 빠른 속도로 전력을 확대했다. 1948년 화동 야전군이 지난(濟南)을 포위했을 때 지휘관은 홍10군단의 참모장이었던 쑤위였고 지난을 수비하던 국민당군대의 지휘관은 화이위산에서 홍10군단을 추격하던 왕야오우였다.
14년 전의 적아가 다시 마주 선 것이다. 쑤위는 전쟁터에 묻힌 쉰화이저우, 형장에서 사형당한 팡즈민과 류처우시, 후텐타오를 생각하며 지난 공격전의 슬로건을 “지난부에 쳐들어가 왕야오우를 사로잡자”로 정했다.
1948년 9월 4일 지난시 전역이 해방되고 왕야오우가 포로되었다. 쑤위는 승리의 첩보로 희생된 팡지민과 류처우시, 쉰화이저우, 후톈타오 등 영웅들의 영혼을 기린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