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이켜 보면 중국혁명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글로벌화의 행정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글로벌화는 신 대륙과 신 항로의 발견, 그리고 바스코 다가마, 크리스포터 콜럼버스, 페르니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글로벌화의 배경에서 제국주의가 군함과 대포로 자본주의를 전 세계로 확장시키고 전 세계적으로 약탈을 감행했으며 그 때 아시아 나라들은 거의 모두가 위험에 처했고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대영제국은 16척의 군함과 4,000명의 육군으로 당시의 청(淸) 정부를 핍박해 주권을 상실하고 국위를 실추시킨 <난징(南京)조약>을 체결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 도합 25,000여명이 중국의 수도에 진입해 살인과 방화를 일삼았으며 원명원(圓明園)에 방화를 저질러 정원의 으뜸이라 불리던 원명원을 폐허로 만들었다.
1894년에 이르러 갑오(甲午)전쟁의 패전과 함께 <마관(馬關)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은 전례 없는 규모로 땅을 내주고 배상금을 물었다. 갑오전쟁의 종료와 함께 사실상 중국의 국토는 다수의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졌고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 국가로 전락되었다.
그 동안 항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청 나라 도광(道光) 황제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내렸고, 함풍(咸豊) 황제도 영국, 프랑스와 맞섰으며, 광서(光緖) 황제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자희(慈禧) 태후도 13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국내에서도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과 념군(捻軍)봉기, 백련교(白蓮敎) 봉기, 의화단(義和團) 봉기 등을 망라해 많은 운동이 있었으나 역시 궁극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이 것이 바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의 운명이었고 대혁명의 배경이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중국혁명이 시작되었고 1840년이래 나라의 장래를 탐구하던 수많은 운동이 신해혁명(辛亥革命)이라는 돌파구를 찾았다.
신해혁명은 2천여 년의 중국 봉건통치 역사를 끝맺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은 철저하지 못해 혁명의 성과가 찬탈되었고 중국은 공화의 실현을 달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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